길에 떨어진 장갑 한켤레 보면 생각날 이야기
[이정희 기자]
▲ 빨간 장갑 |
ⓒ 킨더랜드 |
홀로 거리에 떨어진 장갑 한짝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빨간 장갑 한 짝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곧 돌아오겠지", 빨간 장갑은 그 자리에서 나머지 다른 한 짝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는 걸 모르는지 나머니 한 짝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설상가상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눈발이 점점 세졌습니다. 아마 그대로 있다보면 눈발이 파묻혀 버리겠지요. 그러면 빨간 장갑의 모습은 눈 속에 파묻혀 버리고, 사람들은 그게 빨간 장갑인지도 모르고 밟고 지나가고, 그렇게 빨간 장갑의 존재는 사라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도대체 이 넓은 도시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거리를 가득 메운 장갑 커플들 사이에서 빨간 장갑의 마음은 어떨까요? 빨간 장갑은 자신이 너무 작게만 느껴졌습니다. 그저 한 짝을 잃어버렸을 뿐인데, 그런데 장갑은 한 짝, 한 짝이 만나 한 켤레가 되었을 때만이 그 역할을 다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 빨간 장갑은 그저 한 짝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처지에 놓인 거지요.
이제 만날 수 없을 도 몰라
빨간 장갑은 포기하려 합니다. 그런데 길 건너 장갑 인파들 속에서 나머지 빨간 장갑 한 짝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나머지 한 짝을 찾으려 육교 위에 올랐던 빨간 장갑은 서둘러 육교에서 내려와 쫓아갑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또 헤어질지도 몰라', '지금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빨간 장갑은 온 힘을 다해 달려갑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화 속 아름다운 엔딩 장면처럼 또 다른 빨간 장갑 한 짝도 이 빨간 장갑 한 짝을 찾아 헤매이고 있었던 것일까요? 눈오는 크리스마스 거리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상봉이 이루어지는 걸까요?
▲ 빨간 장갑 |
ⓒ 킨더랜드 |
그런데 꼭 이 빨간 장갑의 이야기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 대한 것만은 아닐 듯싶습니다. 거리에 떨어진 장갑처럼, 장갑으로서 자신이 해왔던 일들로부터 본의 아니게 배제되는 시간들을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 빨간 장갑 |
ⓒ 천개의 바람 |
또, 짝을 잃은 빨간 장갑
여기 짝을 잃어버린 또 다른 빨간 장갑이 또 있습니다. "작은 손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내일도 푹신푹신하게 해주자. 모레도, 그 다음 날도", 그렇게 오른쪽 왼쪽 장갑은 매일매일 약속을 했건만 놀러나간 꼬마는 그만 오른쪽 장갑을 잃어버리고 와요. "인간의 아이가 잃어버린 것이 분명해", 눈 속에 떨어진 장갑을 여우가 살며시 나뭇가지에 걸어놓지요.
▲ 빨간 장갑 |
ⓒ 천 개의 바람 |
왼쪽 장갑은 여전히 아이의 손을 폭신폭신하게 감싸주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동물 마을로 간 오른쪽 장갑의 삶은 드라마틱하게 변화합니다. 찻주전자 덮개가 되었다가, 모자가 되었다가, 침낭이 되었다가, 스웨터가 됩니다. 당연히 그 변화무쌍한 삶만큼이나 모습도 변합니다. 올이 풀리고 늘어나고 구멍이 숭숭 뚫리고...
둘은, 지금 똑같이 행복해요
하야시 기린이 글을 쓰고, 오카다 치아키가 그림을 그린 <빨간 장갑>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함께 하자던 둘은 이제 서로 떨어져 그리워하는 처지이만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장갑으로서의 최선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아!, 그런데 이리야마 사토시의 장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잃어버린 한 짝을 찾다 지친 장갑은 발길이 닫는대로 걷기 시작합니다. 벤치에 튀어나온 녹슨 못에 올이 풀려나가기 시작한 장갑, 그런데 장갑의 올이 한 줄씩 풀릴 때마다 지나간 추억도 하나씩 풀려나갔습니다. 마치 이적의 노랫말,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듯이.
그리고 이제 더는 빨간 장갑은 장갑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얀 눈밭에 어느 것 하나 반짝이지 않은 것이 없었던 소중했던 시간만큼이나 길게 드리워진 빨간 실, 그 실의 끝에서 소녀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빨간 장갑이던 빨간 실뭉치를 감아갑니다. 그렇게 빨간 장갑의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됩니다.
두 편의 <빨간 장갑> 중 어느 이야기에 마음이 따라가시나요. 아마도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새해라는 방점을 찍는 건 지나간 시간에 얹히지 말고 일신우일신( 日新又日新)하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세상 모든 빨간 장갑 한 짝에게 바칩니다'라고 이리야마 사토시는 말을 맺습니다. 이 말을 새해 덕담으로 돌려드립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세상의 모든 빨간 장갑 한 짝들에게 이 그림책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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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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