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떨어진 장갑 한켤레 보면 생각날 이야기

이정희 2023. 1. 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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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같은 두 권의 그림책 <빨간 장갑>

[이정희 기자]

덕담이 오가고 새해의 다짐들로 분주한 새해의 첫 주, 그림책으로 마음을 열어보면 어떨까요. 여기 두 권의 <빨간 장갑> 그림책이 있습니다. 
 
 빨간 장갑
ⓒ 킨더랜드
 
홀로 거리에 떨어진 장갑 한짝 
올 겨울에 장갑 마련하셨나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장갑은 헤어져서 못쓰게 되는 경우보다는 한 짝을 혹은 한 컬레를 우연히 잊어버려서 다시 사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이리야마 사토시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빨간 장갑>도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빨간 장갑 한 짝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곧 돌아오겠지", 빨간 장갑은 그 자리에서 나머지 다른 한 짝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는 걸 모르는지 나머니 한 짝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설상가상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눈발이 점점 세졌습니다. 아마 그대로 있다보면 눈발이 파묻혀 버리겠지요. 그러면 빨간 장갑의 모습은 눈 속에 파묻혀 버리고, 사람들은 그게 빨간 장갑인지도 모르고 밟고 지나가고, 그렇게 빨간 장갑의 존재는 사라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빨간 장갑은  나머지 한 짝을 찾아 나섭니다.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 거리는 북적였습니다. 거리를 오가는 장갑들은 모두 즐겁고 다정하게 걷고 있습니다. 그 사이를 빨간 장갑은 잃어버린 한 짝을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어제까지 빨간 장갑은 또 다른 한 짝과 함께 주인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런 날이 계속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하루 사이에 빨간 장갑은 홀로 자신의 짝을 찾아 헤매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도대체 이 넓은 도시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거리를 가득 메운 장갑 커플들 사이에서 빨간 장갑의 마음은 어떨까요? 빨간 장갑은 자신이 너무 작게만 느껴졌습니다. 그저 한 짝을 잃어버렸을 뿐인데, 그런데 장갑은 한 짝, 한 짝이 만나 한 켤레가 되었을 때만이 그 역할을 다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 빨간 장갑은 그저 한 짝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처지에 놓인 거지요. 
아마도 겨울의 거리를 거닐다 한번쯤은 저렇게 홀로 떨어진 장갑을 '목격'한 일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냥 누가 장갑 한 짝을 흘렸네 하면서 무심히 지나쳤던 장면, 그런데 그림책 속 흑백의 장갑 커플들로 가득한 거리에서 나머니 한 짝을 찾아 헤매는 빨간 장갑의 모습은 언젠가 스쳐 지나갔던 거리의 장갑에 대한 기시감과 함께, 그래서 더욱 그림책 속 이야기에 공감을 자아냅니다.
 
이제 만날 수 없을 도 몰라 

빨간 장갑은 포기하려 합니다. 그런데 길 건너 장갑 인파들 속에서 나머지 빨간 장갑 한 짝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나머지 한 짝을 찾으려 육교 위에 올랐던 빨간 장갑은 서둘러 육교에서 내려와 쫓아갑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또 헤어질지도 몰라', '지금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빨간 장갑은 온 힘을 다해 달려갑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화 속 아름다운 엔딩 장면처럼 또 다른 빨간 장갑 한 짝도 이 빨간 장갑 한 짝을 찾아 헤매이고 있었던 것일까요? 눈오는 크리스마스 거리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상봉이 이루어지는 걸까요?

"아! 미안해요. 잘못봤어요." 이 빨간 장갑의 그 빨간 장갑 한 짝은 아니었네요. 빨간 장갑이 나머지 한 짝을 찾으려 헤매인 시간만큼이나 빨간 장갑이 나머지 한 짝과 함께 주인의 손을 따스하게 감싸던 예전의 역할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해졌지요. 이제 빨간 장갑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빨간 장갑
ⓒ 킨더랜드
2022년을 보내는 마음이 어떠셨나요? 그림책 속 흑백의 거리를 가득 메운 장갑 커플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과 충만한 시간을 보내셨나요? 그게 아니면 짝 잃은 빨간 장갑처럼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 홀로 쓸쓸한 시간을 견뎌내셨나요? 

그런데 꼭 이 빨간 장갑의 이야기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 대한 것만은 아닐 듯싶습니다. 거리에 떨어진 장갑처럼, 장갑으로서 자신이 해왔던 일들로부터 본의 아니게 배제되는 시간들을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혹은 그건 자신이 익숙하게 믿어왔던 신념일 수도 있고, 정의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시절이 바뀐 2022년을 살아간 많은 이들의 마음이 거리에 떨어져 나머지 한 짝을 찾는 빨간 장갑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빨간 장갑
ⓒ 천개의 바람
 
또, 짝을 잃은 빨간 장갑 

여기 짝을 잃어버린 또 다른 빨간 장갑이 또 있습니다. "작은 손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내일도 푹신푹신하게 해주자. 모레도, 그 다음 날도", 그렇게 오른쪽 왼쪽 장갑은 매일매일 약속을 했건만 놀러나간 꼬마는 그만 오른쪽 장갑을 잃어버리고 와요. "인간의 아이가 잃어버린 것이 분명해", 눈 속에 떨어진 장갑을 여우가 살며시 나뭇가지에 걸어놓지요. 

그런데 그만 그날 밤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고, 나뭇가지에 걸렸던 장갑은 다시 눈속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걸 엄마 토끼가 주웠어요. 집으로 돌아온 엄마 토끼는 그걸 쌍둥이 토끼들에게 주었습니다. 사이좋게 나란히 장갑을 머리에 쓰고 잠이 든 아기 토끼들, "따뜻하고 폭신폭신해", 그 밤 오른쪽 장갑은 왼쪽 장갑이 그리웠어요. 
 
 빨간 장갑
ⓒ 천 개의 바람
 
왼쪽 장갑은 여전히 아이의 손을 폭신폭신하게 감싸주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동물 마을로 간 오른쪽 장갑의 삶은 드라마틱하게 변화합니다. 찻주전자 덮개가 되었다가, 모자가 되었다가, 침낭이 되었다가, 스웨터가 됩니다. 당연히 그 변화무쌍한 삶만큼이나 모습도 변합니다. 올이 풀리고 늘어나고 구멍이 숭숭 뚫리고...
하지만 그날 밤 '포근하게 감싸주자'는 약속을 했던 오른쪽 장갑의 역할은 모습이 변해도 여전합니다. 모습이 달라져도 장갑은 장갑입니다. 왼쪽 장갑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여전하구요. 
 
둘은, 지금 똑같이 행복해요

하야시 기린이 글을 쓰고, 오카다 치아키가 그림을 그린 <빨간 장갑>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함께 하자던 둘은 이제 서로 떨어져 그리워하는 처지이만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장갑으로서의 최선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아!, 그런데 이리야마 사토시의 장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잃어버린 한 짝을 찾다 지친 장갑은 발길이 닫는대로 걷기 시작합니다. 벤치에 튀어나온 녹슨 못에 올이 풀려나가기 시작한 장갑, 그런데 장갑의 올이 한 줄씩 풀릴 때마다 지나간 추억도 하나씩 풀려나갔습니다. 마치 이적의 노랫말,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듯이.

그리고 이제 더는 빨간 장갑은 장갑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얀 눈밭에 어느 것 하나 반짝이지 않은 것이 없었던 소중했던 시간만큼이나 길게 드리워진 빨간 실, 그 실의 끝에서 소녀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빨간 장갑이던 빨간 실뭉치를 감아갑니다. 그렇게 빨간 장갑의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됩니다. 

두 편의 <빨간 장갑> 중 어느 이야기에 마음이 따라가시나요. 아마도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새해라는 방점을 찍는 건 지나간 시간에 얹히지 말고  일신우일신( 日新又日新)하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세상 모든 빨간 장갑 한 짝에게 바칩니다'라고 이리야마 사토시는 말을 맺습니다. 이 말을 새해 덕담으로 돌려드립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세상의 모든 빨간 장갑 한 짝들에게 이 그림책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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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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