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문심’과 ‘윤심’

손병호 2023. 1. 6.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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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호 편집국 부국장


문재인 전 대통령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사법연수원 동기다. 졸업 때 단둘이 찍은 사진을 남겼을 정도로 마음이 통했다. 이후 둘 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우정을 넘어 서로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졌다. 그러다 같은 당 동지가 돼 대통령과 시장이 됐다. 그런 두 사람이었지만 현직에 있을 때 박 시장이 문 대통령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하는 얘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박 시장은 두 가지 일이 섭섭했다고 소개했다. 첫째는 맥주. 당시 시장 공관은 종로구 가회동에 있었다. 박 시장은 공관이 청와대에서 차로 5분 거리라면서 문 대통령한테 저녁에 맥주 한잔 마시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 안 부르더라는 것이다. 국무회의 때 대통령을 종종 보긴 하지만, 편안한 분위기에서 우정을 나누고 싶은데 도통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다른 하나는 대통령 특사. 박 시장은 2017년 19대 대선 때 당내 경선에 나섰다가 중도 포기했다. 당시 경쟁자들이 문 대통령, 이재명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희정 전 충남지사였다. 박 시장이 포기하면서 문재인 대세론은 더 굳어졌고 결국 최종 승리했다. 대선이 끝나고 박 시장은 문 대통령한테 긴한 부탁을 하나 했다. 당시 최악으로 치닫던 남북 관계를 돌려보겠다면서 자신을 대북특사로 보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4강 특사를 비롯한 숱한 특사 자리를 다 제쳐놓고 구태여 박 시장을 아세안특사로 보냈다. 박 시장으로선 여간 실망스러운 특사가 아닐 수 없었다.

문 대통령이 박 시장을 불러 술 한잔 하지 않은 것이나, 가나 마나 한 곳에 특사로 보낸 이유가 뭘까. 그건 이재명, 안희정 등 다른 차기 주자들 가운데 박 시장만 특별대접을 하지 않겠다는 의중이 아니었을까 싶다. 청와대에 단독으로 초청돼 대통령과 술잔을 기울이고 대북특사로 다녀오면 대권 주자로서 위상이 수직 상승할 것임은 자명하다. 문 대통령도 그것을 고민하다 끝내 절친의 부탁을 하나도 들어주지 못한 듯하다. 문 대통령은 이후 20대 대선 경선이 끝날 때까지도 당내에 ‘문심’(문 대통령 의중)이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재명, 이낙연 캠프 모두에서 문 대통령이 자신들과 너무 거리를 둔다고 불만이 터져나올 정도였다.

이에 비하면 지금 여권의 풍경은 퍽 낯설다. 국민의힘은 요즘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윤심’(윤석열 대통령 의중) 논란으로 시끄럽다. 김기현 의원과 ‘윤핵관’(윤 대통령 핵심 관계자)이 관저에 초대돼 대통령과 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흘리면서 윤심이 자신들에게 쏠린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반면 초대받지 못한 이들은 ‘윤심팔이’ 하지 말라고 비판하고 있다. 안철수 의원은 뒤늦게 ‘나도 관저 초청을 받았다’고 공개했고, 아직 초청 소식이 없는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은 “관저엔 특별한 분들만 가는 것 같다. 갔다와야 낙점 받는 것 같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이에 윤 대통령은 “내가 여의도 정치를 얼마나 했다고 윤핵관과 윤심이 있겠나”라는 입장이다. 대통령은 부인했지만 윤심이 당대표 선거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진짜 없다면 누군가 악용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대통령실이 ‘유령 윤심’을 내세우지 말라고 공식적으로 주의를 주는 게 맞는다. 무엇보다 당을 개혁하고 국정 운영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하겠다는 비전 경쟁이 아니라 ‘누가 날 대표 시켜주려 한다’는 것으로 선거를 치르려는 것 자체가 구식 정치다. 그런 여당을 과연 국민이 지지할 수 있을까. 당장에는 일부 주자들이 윤심 덕을 볼지 몰라도, 국민을 대통령과 당에 등을 돌리게 해 더 큰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윤 대통령부터 당 선거나 차기 대선 주자들과 관련해선 보다 엄격하게 중립을 지킬 필요가 있다. ‘비공개 관저 정치’가 오해를 사거나 정치인들한테 악용될 수 있음도 염두에 둬야 한다. 대통령이 당 선거에 개입하는 듯한 오해가 생기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 대통령이 누구 편을 든다는 소문이 퍼지면 자칫 민의와 동떨어진 당권이 창출되고, 엉뚱한 대권 주자가 힘을 받는 ‘정치 왜곡’이 생길 수 있어서다. 이는 종국에는 여권 전체를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대통령실이나 여당 모두 당내 정치를 정상으로 돌려놓는 일에 속히 나서야 한다.

손병호 편집국 부국장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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