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평온은 어디에서 오는가
초록의 바다는 평온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다. 풍파를 겪지 않았을 리 없으련만 그림이 된 바다는 단단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가을에 제주에서 김보희 작가의 전시회를 본 것은 행운이었다. 제주 풍경의 대작들이 멀리서 온 여행객에게 좋은 기운을 전해주고 있었다. 평온한 느낌이 마음을 헹궈준다고나 할까. 전시회장을 나와 아트숍에서 도록을 펼쳐보았다. 두껍고 무거운 도록이었다. 그림의 느낌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몇 번이나 들었다가 놓았다. 여행 가방에 넣기엔 무리였다. 작은 엽서집 몇 종류는 품절이었다. 온몸에 이상한 꿈틀거림이 일었다. 김 작가의 책을 내야겠다는 출판인으로서의 흥분감이었다. 도록보다 가볍고, 엽서보다 다양한 그림이 수록된 책을 내고 싶다. 책이라면 전시장에 쉽사리 올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가닿을 수 있다. 이 그림의 감흥을 많은 사람과 나눠야 한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어렵게 김 작가와 연결됐다. 제주 서귀포에 있는 김 작가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붓과 물감들, 작업 중인 캔버스의 날것의 느낌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작업실 마당에는 전시장 그림에서 봤던 야자나무와 용설란, 귤나무와 동백이 생명력 넘치는 모습으로 뻗어 있었다. 검은 개가 방문객에게 꼬리를 흔들었다. 내가 그림 속의 세계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김 작가는 그림만 그리며 조용히 묻혀 살고 싶었다고 했다. 요즘은 전시회를 할 때도 동영상 촬영이나 인터뷰를 해야 해서 곤혹스럽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림을 세상과 만나게 하려고 노력하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니 그 정도 노출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나는 도록 이야기를 꺼내며, 누구나 볼 수 있는 책을 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2년 전 서울 시내 갤러리 앞 도로에 늘어섰던 사람들 이야기도 꺼냈다. 그때 그 긴 줄은 화제였다. 한두 번이 아니라 전시회 내내 줄이 길었다. 김 작가의 전시회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강렬한 자연 풍경과 초록이 생생한 이상향의 그림이 일상의 결핍과 무기력을 위로하는 힘이 됐다. 사람들은 복잡한 세상에서 소진돼가는 기운을 되찾고 싶어했다. 김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위로와 힘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책을 주자고 설득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김 작가는 한지가 아닌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 그렇다면 서양화로 건너간 것인가. 김 작가는 초록의 푸른 기운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지 어떤 분류에는 관심이 없다고 대답했다. 동양화니 서양화니 경계를 짓는 일은 작가에게 의미가 없다고. 주로 먹으로 표현하는 동양화 공부를 했지만 채색을 좋아했고, 지금은 좋아하는 색상을 표현하는 마음을 닫을 수는 없다고 했다.
작가의 바다는 어찌 이리 평온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린 바다 그림은 본 그대로를 그린 것은 아니에요. 보고 싶어하는 바다를 그린 거죠. 지금이라도 당장 바다에 가보면 그림 속의 색상은 아니에요. 회색일 수도 있고 분홍빛 바다일 수도 있죠. 매일 다릅니다. 그림 그릴 때 내가 어떤 바다를 그리고 싶어하는가가 중요하죠. 나에게는 격랑을 이겨낸 고요하고 평온한 바다를 그리고 싶은 의지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작가지만 풍경과 사물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모사에서 시작해도 결국 상상력과 의지의 영역이다. 삶도 그렇지 않은가. 상상력과 의지를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가가 생활을 결정짓지 않는가 말이다.
김 작가와는 생애 첫 책을 내기로 했다. 두 번째 작업실을 방문한 날 새해 달력을 선물로 받았다. 작가의 그림으로 만든 달력이었다. 내가 머물고 싶은 낙원의 그림들이 열두 달에 거쳐 펼쳐 있었다. 매일매일의 평온을 기원하는 마음을 선물받은 듯했다.
평온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예술 작품 앞에서 자신에게 물었다. 고난을 모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고난을 디딘 아름다움 가까이에 평온이 있다고 스스로 답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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