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나쁜 대안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
파벌·금권 정치 야기하는 한계 분명
1·2당 패권적 행패에 대안으로 부상
김대중(DJ)·노무현·이명박(MB)·윤석열 대통령. 모두 재임 중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을 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역주의를 없애길 원한다면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MB의 말이지만 다른 대통령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DJ는 1987년 중선거구제에서 현행 소선거구제로 이행을 압박한 인물이지만 대통령이 되어선 생각을 달리했다.
“승자독식의 현행 선거제도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하는지, 우리의 미래에 합당한지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8년여 전 정의화 국회의장의 주문이었고 현 김진표 의장의 주문이기도 하다.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도 의지가 있었는데 왜 안 됐느냐. 또 하나는, 그리 좋은 제도인가.
먼저 왜 안 됐느냐의 문제다. 아무리 순응적 의원도 배지가 위태롭다 싶으면 광포해진다. IMF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 비교적 조용하게 지역구 26석(253석→227석)을 줄인 게 대단히 이례적 경험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대개 육탄전이 벌어진다. 중·대선거구제로의 이행은 전 선거구가 영향을 받는다. 의원 모두 날이 설 수밖에 없다.
더욱이 타격이 불균질하다. 선거구별로 당선이 확실한 득표율을 계산하는 식이 있는데(득표수/(선출의원 정수+1)), 선거구당 한 명을 뽑을 땐 50%, 2명이면 33.4%다. 수도권에선 선거구당 2명을 뽑으면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이 동반 당선된다. 영남도 비슷하다. 영남에서 민주당의 득표율이 30% 넘나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남=국민의힘 텃밭’이란 점이다. 이는 국민의힘 영남 의원(56명) 절반 가까이 배지를 떼야 한다는 뜻이다. 국민의힘이 호남(28석)에서 의석을 확보하면 그나마 위로가 될 터인데, 여의치 않다. 호남에서는 국민의힘 후보자들(출마하지 못한 곳이 더 많다)의 득표율이 5%를 밑돈다. 이론상 이런 득표율로도 당선이 확실해지려면 선거구당 19명을 뽑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현실은 이보다는 덜 엄혹할 것이다. 분명한 건 영남에서 국민의힘이 30석 가까이 내주고 호남에서는 한두 석 얻을까 말까 할 가능성이다. 의원들의 본성에 반한다.
중·대선거구제가 좋은 제도라면 저항을 뚫어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오죽하면 과거 선거제 개편 논의 때 상당수 정치학자가 “개선 아닌 개악”이라고 했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도 2009년 ‘선거제도 선진화 방안’이란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과거 일본에서 (중·대선거구제를 할 때) 같은 당 소속 후보들끼리 경쟁을 부추겨 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책 대결보다 후보자 개인 간 경쟁으로 이어졌고, 선거운동 역시 당이 아니라 후원회나 파벌 조직 등에 의존하는 형태로 치러졌다. 이 때문에 중·대선거구제는 고질적인 파벌 정치와 정치자금의 팽창 등 금권선거 조장을 통해 정치가와 기업 간의 유착과 정치 부패를 낳는 ‘사악한 제도’로 인식됐다.”
그렇다면 지금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을 주장하는 건 무책임한 일인가. 쉽사리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두 당이 보이는 패권적 행패 때문이다. 이러다 나라 망하겠다 싶을 정도다. 문득 강 교수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과거엔 중·대선거구제에 부정적이었는데.
“학자적 관점에선 문제가 있는데… 조금이라도 다당적 구도로 가고 새로운 인물을 충원하거나 기득권 정당에 변화가 만들어질 수 있으면 뭐라도 시작했으면 좋겠다.”
-두 당의 기득권을 더 강화하지 않을까.
“1985년 총선은 달랐다. 당시 2인 선거구였는데 새로운 야당이 생겼다. 지금 진영 사고가 강한 사람이 많지만, 두 정당이 다 싫다는 사람도 40%는 된다. 수도권에서 선거구당 3명을 뽑으면 달라질 수 있다.”
하기야 85년 총선에서 신민당의 돌풍은 5공의 민정당-민한당-국민당 구도에 심대한 균열을 냈다. 그런 일이 또 벌어질까. 나쁜 제도인 중·대선거구제가 이젠 어엿한 대안처럼 보인다.
고정애 chief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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