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아내·자식들도 속였다…'가짜의사'가 27년간 안걸린 까닭

손성배 2023. 1. 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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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지방의 한 의대에 입학한 A씨(62)는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학비를 마련하느라 휴학과 복학을 거듭했다. 10년 만인 1993년 2월에야 졸업장을 받아들었다. 힘들게 의대를 졸업했지만 의사국가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의사 면허를 갖지 못했다.

A씨는 2년여간 별다른 직업 없이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함께 졸업한 의대 동문에게 의사 자격증을 빌렸다. A씨는 이를 복사한 뒤 본인의 증명사진을 오려 붙이고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써 넣어 위조했다. 1995년부터 위조한 의사 면허증으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일대 종합병원과 원장 1인 혹은 2인이 운영하는 정형외과 의원에 취업해 '정형외과 전문의'로 살기 시작했다.

의사 면허 없이 정형외과 전문의 행세하다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진 60대 남성이 위조한 의사면허증


위조 자격증으로 A씨는 27년 간 '정형외과 전문의'로 살았다. 옮겨다닌 병원만 60여 곳에 달했다. 검찰이 확보한 A씨의 허위 의사 면허증은 흘러간 시간을 반영하듯 빛이 바랬고, 의사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서울의 한 소방서에서 받은 ‘119구급대 고문 위촉장’에 찍힌 소방서장의 직인도 흐릿해질 정도로 긴 세월이었다.

2006년 결혼해 자녀를 둔 그는 아내는 물론 자식들에게도 의사 면허 위조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의 모친도 아들이 의사라고 굳게 믿었다.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오기 전까지 A씨의 지인들은 그를 경륜 있는 정형외과 전문의인줄 알았다. A씨 스스로도 자기 스스로 의사라고 믿는 ‘리플리 증후군’에 빠진 것 같다는 게 그를 지켜본 이들의 설명이다.

A씨는 의료계 뿐 아니라 정관계, 법조계 고위직 인사들과도 두루 인맥을 쌓았다. 정형외과 의사 경력을 기반으로 촘촘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그는 이후 더 대담해졌다. 의사 면허 뿐 아니라 출신 학교와 해외 의대 연수 경력까지 거짓으로 기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방 의대를 졸업한 뒤 의사 면허가 없어 수련의(인턴) 교육 과정도 밟지 못한 사실을 감추고, 서울 시내에 대형 병원을 둔 유수의 의대에서 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며 학력을 속였다.

의사 면허 없이 정형외과 전문의 행세하다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진 60대 남성이 위조한 119구급대 고문 위촉장


수사 초기 A씨는 “의사 자격증 갱신을 하지 않아 한시적으로 무자격 의료행위를 한 꼴이 됐다”며 발뺌했다.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 지난해 12월 중순에도 그는 의료 행위를 이어갔다. 하지만 검찰이 주거지 압수수색과 계좌 추적, 휴대전화 디지털 포렌식을 통해 다수의 위조 면허증을 확보해 압박하자 결국 스스로 의사 가운을 벗었다.

의사 면허 없이 정형외과 전문의 행세하다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진 60대 남성이 위조한 홍보자료


A씨는 지난달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해 “모두 인정한다. 내가 잘못했다. 27년 간 임상 경험을 쌓은 만큼 이제라도 의사 면허증을 따려고 준비 중이니 선처를 바란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수원지검 형사2부(부장 양선순)는 A씨를 공문서위조와 위조공문서행사,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부정의료업자), 사기 등 혐의로 지난 2일 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A씨를 고용한 경기도의 한 종합병원 의료재단 법인과 개인병원 원장 8명에 대해서도 A씨의 의사면허 취득 여부 등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고용한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했다.

2014년 10월부터 지난달까지 수도권 일대 종합병원과 정형외과 9곳에서 위조 면허증을 행사해 A씨가 받은 급여는 5억 여원으로 조사됐다. 검찰 관계자는 “기록을 검토하면서 비슷한 판례를 살펴보려 했으나 전례를 찾을 수 없었다”며 “이 사건을 계기로 의사 면허 정보를 공개하는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에 실태 전수조사 건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손성배 기자 son.sungb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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