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학교 이어 유랑극단 좌절, 한글학회 참여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

김삼웅 2023. 1. 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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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 7] 일제는 '민족언어'가 갖는 중요성을 아는 까닭에

[김삼웅 기자]

▲ 1949년경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 인사들 신윤국, 이중화, 윤병호, 최현배, 김양수, 정태진, 정인승, 서민호, 권승욱, 이병기, 김윤경, 이석린, 정열모, 장현식의 모습이 보인다.
ⓒ 한글학회
 
콜롬비아대학원을 마친 서민호는 덴마크의 농업실태를 살피고자 1929년 3월 미국을 떠나 현지에 도착하였다. 꼭 100일 동안 덴마크 농민고등학교에 들어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실습과 견학을 하였다. 

귀국길에 소련·중국·만주를 거쳤다. 이번에 그쪽 세계를 둘러보지 않으면 기회를 갖기 어려울 듯해서였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을 통해 마치 인류의 이상향처럼 인식되는 모스크바의 실정은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많았고 기차역에는 헐벗은 상인들이 우글거렸다. 만주에서는 한인 중에 일제의 앞잡이, 사기꾼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고 동포들을 못살게 구는 악당들의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하며 고국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에게 덴마크식 협동조합운동을 설명하고 이를 위해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친일파로 변신하지 않고서는 어떤 사업을 해도 유지하기 어렵다는 말씀이셨다. 이런 상황이어서 뜻있는 조선의 엘리트 청년들은 자포자기, 울분을 술로 달래고 여유있는 집 자제들은 기방 출입 등 퇴폐한 생활로 청춘을 보내었다. 서민호도 다르지 않았다. 기방 출입이 잦았다.

유일한 탈출구는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가는 일이었다.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 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갑자기 일어난 부친상으로 심한 허탈 상태에 빠졌으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형제들과 상의하여 부친이 남긴 막대한 유산을 7등분하여 6형제가 고루 나누고 장형에게 두몫을 드리기로 하였다. 형제들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550원을 지역사회에 의연금으로 기부했다. 

서민호는 4천2백석에 해당하는 토지와 남선무역주식회사를 배당받았다. 1935년 전남 벌교에 있는 사립송명학교를 인수하여 늘 꿈꾸었던 덴마크식 농민학교를 일구고자 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사립학교를 민족주의 사상의 요새로 인식하고 온갖 탄압을 자행하였다. 정상적인 경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진로를 바꾸었다. 동지들을 규합하여 문화운동을 하기로 했다. 김도연·김양수 등 동지들과 뜻을 모아 재정난으로 해체 직전에 있던 '빅타가극단'을 인수하여 '반도흥업사'로 이름을 바꿔 전국을 돌며 연극과 노래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양하고자 하였다. 자신이 대표가 되고 김도연 감사, 김양수·신윤국·이철원·조정환·서신응 등이 주주, 현재명, 최순주 위원 체제였다. 

대부분 일본이나 미국 유학파들이다. 반도흥업사는 유랑악극단이 되어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연극과 노래로서 민족정신을 잇고자 하였다. 

만주를 통해 임시정부에까지 이르고자 하는 속셈으로 만주에서 공연을 할 때 일경에 의해 강제로 송환되고 극단은 해체당하기에 이르렀다. 해외 유학파들이 모여 뜬금없이 유랑극단을 인수하여 국내공연은 물론 만주에까지 진출하자 총독부가 그 의도를 꿰뚫고 해체시킨 것이다.

새로운 길을 찾았다. 조선어학회였다. 

일제가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른바 황국신민화는 침략전쟁을 위한 수탈을 쉽게하고 차제에 민족운동을 근절하기 위한 통제책으로 세계식민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민족말살책이었다. 창씨개명에 이어 실시된 조선어 교육과 사용금지 정책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일제는 중국 침략을 앞두고 전시체제를 강화하면서 조선인의 저항과 민족의식을 잠재우고 전쟁에 협력시키기 위해 황국신민화 시책을 강행했다. 그 중의 하나가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전면 폐지하고 일본어를 상용케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창씨개명과 함께 민족말살의 핵심적인 책동이었다.

1936년 8월에 부임한 미나미 총독은 이듬해 2월 모든 관공서 관리와 교직원들에게 일본어를 상용할 것을 지시하고, 1938년 3월에는 칙령 제10호로서 이른바 신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 교육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일찍이 제국주의 역사상 식민지 주민에게 고유한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경우는 일제가 유일하다. 일제는 허울좋은 내선일체의 시책을 추진하면서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일본어를 '국어'라고 강변하면서 이를 상용하도록 했다. 철저한 민족정신 말살의 흉계였다.

일제는 '민족언어'가 갖는 중요성을 아는 까닭에 우리말과 글을 못쓰도록 하는데 그토록 집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강점 이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어 사용 금지를 획책해 왔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1911년 전문 30조의 제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초기 식민지 교육방침을 제시했다. 주요 의도는 ① 일본어 보급을 목적으로 했으며 ② 한민족을 이른바 일본의 '충량한 신민'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③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조선인에게 저급한 실업교육을 장려하고자 했고 ④ 조선인을 우민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주석 1)

주석
1> 김삼웅, <외솔 최현배평전>, 71~72쪽, 채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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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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