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됐다 돌아왔는데... 자식 앞길 망친 아버지가 되다 [납북귀환어부 이야기]
[변상철 기자]
▲ 2022년 7월 13일 춘천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재심개시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영택씨. 장대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93세의 그는 고성에서 춘천까지 올라와 기자회견에 참석하였다. 젖은 어깨가 처연해 보인다. |
ⓒ 변상철 |
김영택씨는 1930년 생(93세)으로 현재까지 만난 납북귀환어부 피해자 중 가장 고령의 생존자이다. 고령의 나이에도 매번 속초나 서울에서 열리는 모임·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같은 납북피해자들이 힘들지 않느냐고 걱정하면, 김씨는 오히려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이 좋다며 웃어넘긴다.
전쟁 전엔 남한지역이었지만 종전 후 북한 지역이 되었다는 강원도 영진이 고향인 그는 한국전쟁 발발 후 홀로 남한으로 피난 오게 되었다. 전쟁의 화마를 피해 사흘 정도 남쪽으로 피신했다가 곧 영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부모님을 북에 두고 홀로 월남한 것이었다. 경상북도 포항까지 내려갔다가 국군이 재차 북진할 때 따라 올라왔지만, 결국 김씨는 지금의 휴전선을 넘지 못해 지척의 고향을 두고도 고성 아야진에 머물게 되었다.
김씨는 고향 영진에 있을 때부터 생업으로 고기잡이배를 타기 시작했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 주로 가까운 연안에서 고기잡이배를 타다가 월남 뒤 아야진에 살게 되면서 다시 고기잡이배를 타게 되었다.
승운호는 37살 되던 때부터 타기 시작했다. 오징어배로는 승운호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처음 나간 오징어잡이에서 김씨는 납북귀환어부가 되었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그에게도, 반세기 전 납북귀환의 상처는, 피해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건조하게 주름진 얼굴에 눈물이 한가득 고이게 하는 고통스런 기억이었다. 90세가 넘는 노구의 몸으로 인터뷰를 진행했기 때문에, 인터뷰 중간 중간 숨이 가빠지거나, 설움에 복받쳐 눈물을 흐를 때마다, 잠시 인터뷰를 쉬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북한군
승운호는 원래 연안에서 조업하는 이름 없는 조그만 '똑딱선'(발동기로 움직이는 작은 배)이었다. 1968년경 엄청나게 큰 태풍('폴리')이 몰려와 승운호를 비롯해 많은 선박이 난파되었다. 승운호의 선주는 국가지원을 통해 새로 승운호를 건조했고, 건조하는 과정에서 선박의 크기를 좀 더 크게 하여 멀리까지 나가서 오징어잡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개조했다.
승운호 선장 망 이진형씨와 기관장인 망 조동용씨는 한동네에 살던 사람으로 서로 잘 아는 사이었다. 특히 선장은 김씨 집 바로 밑에 사는 관계로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여전히 김영택씨와 이진형씨의 집은 위 아랫집이다) 오징어잡이 배의 경우, 선주나 선장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으로 선원을 꾸리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친인척이나 동네에서 잘 아는 사람을 선원으로 채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영택씨도 그런 이유로 승운호 선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71년 7월, 승운호를 타고 나간 그 날은 운해가 꽤 끼어 있었다. 선장은 조류가 북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고려해 배를 남쪽으로 틀어가며 작업했다. 당시에는 어군탐지기나 레이더 같은 장비 없이 나침반에만 의지해 배를 운항했기 때문에 조류의 흐름을 읽고 조심스럽게 조업했다고 한다.
납북 당일 오전 9시경은 안개가 심하게 낀 상태였다. 승운호가 조업하던 장소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날이 좋지 않아 물풍(물돛)을 걷고 귀항하려 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북한경비정이 나타났다. 배에 쓰인 문구를 통해 북한 경비정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북한군이 승운호를 향해 총을 겨누며 '밧줄을 준비하라'고 하더니 밧줄을 승운호 앞 코에 걸었다. 그리고는 시동을 끄라고 한 다음, 선원들을 태운 채 끌고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북한 군인은 승운호 선원 모두를 갑판에 나와 있게 했고, 선원들은 공포감에 그들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승운호 선원들이 한참 끌려가 도착한 곳은 북한 장전항이었다. 장전항은 김영택씨가 월남하기 전 살던 영진항 바로 근처였다. 고향에서 가까운 곳이었지만 고향을 떠난 지 한참 되어 처음에는 몰라봤으나, 북한 사람 누군가가 장전항이라 말해주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장전항에 도착한 날 밤, 선원들은 다시 금강산으로 이동했다. 금강산에 가서 별 일 없이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평양으로 이동했다. 평양에서 진행된 신원조사 때 김영택는 월남 사실을 들킬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북한 측에서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한다.
김씨는 평양에 있는 동안 자신을 걱정하며 기다릴 처자식 생각에 남한으로 돌아가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한국전쟁 당시 고향에 남겨져 있을 부모님을 보고 싶은 마음 역시 간절했지만, 오로지 남한에 남아 있는 가족만을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승운호 선원들은 납북되어 있는 동안 '북한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모두 함께 남한으로 가야한다'고 서로 다짐하곤 했다고 한다.
▲ 1971년 고성 아야진 앞바다에서 오징어잡이 조업을 하다 납북된 뒤 1년여 만에 돌아온 승운호. |
ⓒ MBC |
13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수건으로 얼굴을 싸매고 코에다가 물을 붓죠. 의자에 팔을 묶고 꼼짝 못하게 하고는.... 이북에서 무슨 말을 했냐, 지령 받은 것 이야기하라면서 그렇게 고문을 해요. 양쪽 어깨를 맞아서 멍이 시퍼렇게 들어서 팔을 쓰지도 못했어요. 그 뒤로는 배를 못 탔어요. 몸이 아프니 힘든 일도 못했죠. 먹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조사받으면서 하도 두드려 맞아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김씨는, 겨우 집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배를 탈 수도, 몸 쓰는 일을 할 수도 없었다. 김씨가 납북된 후부터 줄곧 혼자 돈을 벌어야 했던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고도 횡성, 홍천 같은 산골을 돌아다니며 미역 장사를 하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김씨 집을 수시로 드나들던 형사들에게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는지 늘 보고해야 했는데, 그런 경찰의 감시는 집으로 돌아오고도 몇 년 간 계속 되었다.
"어디 간다, 며칠 잔다, 누구 만난다는 이야기를 경찰에 꼭 보고해야 해요. 그리고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경찰에서 보고를 꼭 해야 해요. 그런 생활을 몇 년 동안 했어요. 어디 가서 이런 하소연도 못해요. 입도 못 벌려요. 말 잘못하면 수상하다 생각할까봐 겁이 나서 말도 못해요."
93세의 김씨는 위와 같은 이야기들은 평생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자식들이 직장을 구할 때 좋은 자리가 생겨도 입사원서 한번 내지 못하고, 경찰공무원이 된 조카가 진급에서 누락 되는 걸 보면서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며 속앓이를 했다고 한다.
그는 진실화해위원회와 법원에서 자신과 같은 납북귀환어부들의 억울함을 밝혀주었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납북귀환어부로 살며 가족에게 가졌던 미안함과 죄책감이 더 이상 들지 않도록 국가는 국민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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