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처음 설정된 주제 ‘인간 안보’...과학 기술 혁신의 궁극은 결국 ‘인간’

2023. 1. 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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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텍의 ‘테크 트렌드’
기술경영

CES는 가전제품 박람회(Consumer Electronics Show)의 줄임말이다. 요즘은 줄임말인 CES를 공식 용어로 쓴다. 가사 활동을 돕고 집 안에서 여가를 즐기는 전자제품을 넘어 종합 기술 박람회로 발돋움했다는 표현이다.

중세 박람회는 왕의 권위 보이기 위한 축제

세계 최초 박람회는 성경에 나온다. 구약성서에 왕국의 번영과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재화를 전시하고 축제를 베풀었다고 적혀 있다. 이후 중세에도 왕이나 귀족의 권위를 보이기 위한 축제로 박람회가 열렸다. 근대 박람회와 비슷한 행사의 시작은 산업혁명 시기 런던 공업전시회를 거쳐 최초의 엑스포인 1851년 런던 엑스포로 이어진다. 런던 엑스포는 당시 영국 인구의 3분의 1인 600만명이 찾아왔다. 특히 하루 11만명의 방문객이 엑스포를 찾은 날도 있었다. 이제 박람회는 힘을 자랑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는 목적보다는 물건을 모아놓고 사고파는 전람회로 자리 잡는다.

우리나라의 박람회는 모든 물건이 모이는, 신문물을 만나고 거래하는 5일장을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조선은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박람회에 처음으로 참석한다. 제국 열강들의 경쟁 속에 미래가 불투명하던 나라를 알리는 발버둥이었다. 지구촌의 일원으로 참여해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개최된 1900년의 파리 만국박람회는 프랑스 정부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경복궁을 재현한 한국관에는 비단, 놋그릇을 비롯해 악기와 예술품 등이 다양하게 전시됐다. 당시 우리의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박람회 참여 자체가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존재를 알려 나라의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다. 박람회 전시품들은 다시 한반도로 돌아오는 운송비를 부담하지 못하고 프랑스의 다양한 박물관에 기증됐다. 비록 조선을 알리는 데 보탬이 됐지만, 국제사회 현실은 냉혹해 결국 망국의 아픔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의 박람회 역시 식민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일본의 앞선 문명을 식민지에 알려 통치에 활용하는 목적이었다. 조선의 상징인 궁궐을 헐고 대규모 전시관을 만들었다.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물산공진회는 과거 왕의 권위를 알리던 것처럼 일본을 과시했다. 전국적으로 대규모 인원을 동원했는데, 그 수가 100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조선박람회 등의 이름으로 같은 취지의 행사가 수차례 개최된다. 이 시기 우리나라에서 열린 박람회는 중세의 박람회와 같았다. 물건을 사고파는 5일장에서 시작했지만 도리어 권위 과시의 장으로, 역사를 뒷걸음질 친 셈이다.

CES 2022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로봇 개 스팟과 함께 무대 위로 등장하는 모습. (현대기아차 제공)
CES·IFA·MWC…요즘 HOT한 박람회

190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기술과 산업이 발전하고 지구촌은 더욱 좁아지며 무역도 활발해진다. 서로를 연결하는 박람회의 숫자와 규모도 커진다. 자동차 생산 중심지인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와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는 자동차 회사들이 자신들의 기술력을 뽐내며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독일에서는 네트워크, 통신 등을 중심으로 세빗(CeBit)이 열리고, 미국에서는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박람회인 컴덱스(COMDEX)가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세빗은 2018년, 컴덱스는 2003년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 요즘 핫한 박람회는 미국의 CES를 비롯하여 독일 IFA, 스페인 MWC 등이 있다.

베를린에서 열리는 IFA는 베를린 국제 라디오 박람회의 약자다. 백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IFA가 처음 시작됐을 때는 라디오가 기술 문명의 선구자였다. 차차 라디오에서 텔레비전, 가전제품으로 산업 제품의 중심이 이동하며 박람회의 전시품도 다양해진다. 아예 라디오 박람회를 의미하던 단어는 가전 박람회라는 뜻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스페인의 MWC는 이동통신의 장이다.

매년 1월 개최되는 CES 역시 가전제품 박람회로 시작됐다. 어느새 세계는 라디오 시대를 지나 텔레비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사이 우리의 기술력과 경제 역시 크게 성장했다. 평면 디스플레이(LCD, OLED 등) 이전의 브라운관(CRT) 시대에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담당했던 디스플레이 강국이었다. 우리나라 전자제품 기업은 자연스레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CES의 주된 전시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나아가 최근의 CES는 중국 기업의 참여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한국 기업들의 장이라 불러도 될 만큼 우리의 독무대다. 대기업뿐 아니라 많은 스타트업이 CES 부스에 자리 잡는다. 망국의 슬픔을 안고 초라하게 시작한 우리나라의 박람회는 이제 주변인이 아닌 주인공이 됐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가전제품이지만, 집 안에서 세상을 만나는 창구기도 하다. 직접 5일장에 가지 않아도, 박람회 현장에 있지 않더라도 새로운 문물을 살필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요즘 금융, 자동차 등 모든 산업에서 정보통신을 접목하는 노력이 활발하다. 기술과 우리가 만나는 접점인 텔레비전 등의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다양한 기술과 제품이 융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가전이 중심이었던 CES가 각종 첨단 기술이 모이는 종합 박람회로 발전한 것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CES 단순한 가전 박람회 위상 넘어서

예전에는 새로운 과학 지식이 발견되면 이로부터 곧 기술이 개발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다시 새로운 제품이 되고 시장과 산업을 만든다. 과학과 기술, 혁신이 하나의 선을 따라 차례로 발전한다는 선형 모형이다. 지식 창출을 위한 기초연구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 그 뒤는 자연스레 혁신이 따라온다고 여겼다. 다만 ‘1+1=2’와 같은 기초연구 성과물은 누구나 접근 가능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공공재의 성격이 강하다. 회사가 기껏 연구해본들 쉽게 남들이 채가기에, 그만큼의 이득을 보지 못해 투자 가치가 없다. 즉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놔두면 아무도 투자하지 않는 ‘시장 실패’가 일어난다. 정부는 시장 실패가 일어나는 기초연구 영역에 집중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 초기 과학 기술 혁신 정책이었다. 시장에 계속 연구 성과를 공급하면 제품이 나올 것이니, 기술과 산업의 공급자 관점에서 기업 경영과 정책을 수립했다.

혁신은 선형 모형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일어난다. 날이 갈수록 과학과 기술은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다. 연구개발에서 제품화까지의 시간이 짧아졌으며, 동시에 일어나기도 한다. 다양한 과학과 기술이 어우러져 새로운 상품이 탄생한다.

과학 기술 혁신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박람회의 흐름에도 투영된다. 세빗, 컴덱스, 모터쇼가 힘을 잃고 CES가 주목받는다. CES도 가전 박람회로 시작됐지만, 기술과 제품의 융합을 훌륭히 담아냈다. 가령 2023년의 CES에는 300개 이상의 자동차 관련 기업이 참여한다. 최신 자율주행차, 전기차, 개인 이동장치 등은 자동차와 IT 기술 융합의 산물이다. 더 이상 CES를 단순한 가전제품 박람회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CES 2023의 주제는 모빌리티, 헬스테크, 웹 3.0과 메타버스, 지속 가능성, 인간 안보 등 5개다. 최근 몇 년간 기후변화 위기 속에 에너지, 환경 같은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을 계속 선보여왔다. 2023년은 이보다 조금 더 확장된 담론이 펼쳐진다. 몇 년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CES를 비롯한 삶의 모습이 예년 같지 않았다. 인류는 비로소 질병을 비롯해 범죄 등의 다양한 문제에서 인간을 지키는 일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올해 처음으로 주제로 설정된 ‘인간 안보’의 의미다.

과학 기술이 만들어가는 미래를 엿보는 창 ‘CES’

과학 기술 혁신은 삶을 보다 풍요롭고 편하게 할 뿐 아니라, 언제나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CES 2023에서는 기술이 인간 안보에 어떤 역할을 할지 보여줄 것이다. 과학 기술 현장에서 연구하는 학자와 기업인뿐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다양한 이들도 CES로 모이고 있다. 이제 CES는 가전제품을 넘어 기술의 융합뿐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사회 등의 모습을 담는다. 미래의 모습을 바라보는 창이다. CES에서 봐야 할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며 살게 될 세상이다.

정우성 포항공과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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