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충성도·생태계 어마어마한 ‘VR챗’...VR 헤드셋 끼고 접속…‘레디 플레이어 원’ 구현
우리가 잘 몰랐던 메타버스와 VR
“새로운 기기(애플의 XR 제품)가 시장에 진입하면
새로운 성장과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 앤드류 보즈워스 메타 CTO >
2021년 가장 뜨거운 버즈워드(유행어) 중 하나였던 메타버스.
하지만 2022년 들어 메타버스는 차가운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메타버스를 이끌었던 메타가 대규모 구조조정과 함께 주요 프로젝트의 축소를 예고했다. 메타의 서비스 중 하나인 호라이즌 월드의 경우 월 사용자가 20만명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뿐 아니라 웹 3.0 메타버스로 알려진 디센트럴랜드의 경우 일 사용자 수가 1000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걸로 밝혀졌다. 엄청난 기대치에도 불구하고 대중화 수준이 처참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메타 호라이즌 월드가 닮고 싶어 한
이미 현실이 된 메타버스: VR챗
메타버스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은 앞서 언급한 메타의 서비스 호라이즌 월드 실패가 계기가 됐다. 2021년 12월에 시작된 이 서비스는 사실 서비스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다. 메타가 만드는 VR 헤드셋의 기본 소셜 플랫폼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어드밴티지를 갖고 시작했지만, 사용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호라이즌 월드가 타깃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비스가 하나 있다. 마크 주커버그 메타 CEO가 이 서비스를 그대로 자신들에게 가져오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서비스로, VR챗이라는 회사가 만든 VR챗이다. 2014년 서비스가 시작된 VR챗은 2021년 8억달러 투자를 받으면서 유니콘 기업이 됐다. 평균 동시 접속자 수는 2만명. 많을 때는 3만명 정도가 동시에 사용한다고 한다. 월 사용자로 환산하면 호라이즌 월드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실제 사용자 얘기를 들어보면 호라이즌 월드는 VR챗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사용자의 충성도와 안에 이미 만들어진 생태계가 어마어마하다는 얘기다. VR챗이나 호라이즌 월드 같은 소셜 VR들은 사실 매우 단순하다. 사용자들은 아바타를 만들어서, ‘월드’에 들어가고, 거기서 다른 유저들의 아바타와 대화를 하거나, 같이 게임을 한다. VR챗도 마인크래프트, 로블록스처럼 사용자가 월드나 캐릭터를 직접 만들 수 있는 개방된 시스템이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 제일 근접
3만명이 동시에 접속하는 VR 플랫폼
VR챗이 2003년 나온 ‘세컨드라이프’나 ‘마인크래프트’ 같은 샌드박스 게임과 가장 큰 차이점은 VR 헤드셋을 끼고 사용한다는 점이다. 물론 PC 모드로 접속이 가능하지만 제대로 사용을 하려면 헤드셋이 필요하다. 단순화된 캐릭터들이 활동하는 다른 메타버스와 달리 실제 현실과 가까운 리얼월드가 구현돼 있고, VR을 통해서 몰입도를 높였다.VR챗은 이용자들이 월드나 캐릭터를 만드는 데 따른 개방성이 매우 크다. 월드를 만든다는 건 단순히 배경 세계를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로블록스처럼 ‘게임’을 만들 수 있고, 아바타에 다양한 효과를 부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아바타가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손오공처럼 가메하메파를 쓸 수도 있다. 메타버스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VR챗’에서 가장 영화에 가깝게 구현돼 있다.
익명 속에 숨은 사람들
VR챗이라는 심연
그런데 VR챗은 왜 대중적으로 덜 알려져 있을까? 왜 메타에서 적극적으로 인수하려고 하지 않을까? 와츠앱이나 인스타그램을 인수했던 것처럼 말이다.
VR챗은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묘사했던 메타버스에 빠진 사람들의 문제점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 현실을 도피하면서 메타버스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이처럼 VR챗의 밝지 못한 부분은 ‘심연(깊은 못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자조적으로 불리고 있다. VR 기기를 남성들이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VR챗 사용자는 남성인 경우가 많은데, 대략 사용자의 80%가 남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소셜 VR 생태 보고서). 그런데 VR챗에서 사용되는 전체 아바타의 80%가 여성의 외모를 갖고 있다고 한다. 물론 여성 아바타를 쓰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 중에는 여성인 척 정체를 숨기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VR챗은 익명의 공간인 데다가, 겉모습뿐 아니라 목소리도 변조를 통해서 바꿀 수 있다. 인터넷에서 여성을 사칭하는 것을 뜻하는 ‘넷카마’가 VR챗에는 많다고 한다. VR챗은 메타버스에서 벌어지는 성범죄의 온상으로 자주 지목되는 곳이기도 한다. 메타버스뿐 아니라 인터넷 어디든 인간이 활동하는 곳에서는 어두운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도 그런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다른 2차원의 인터넷과 달리 3차원의 몰입된 경험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은 사용자에게 훨씬 큰 정신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 특히, VR챗 내부의 사정을 모르는 외부의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더욱더 음침하고 부정적으로 보이게 된다.
VR 세계에 대한 깊은 편견
소셜 VR을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메타버스상에서 다른 사람과 친밀감을 느끼기 위해서 들어온다. 데이팅 앱을 사용하는 것처럼 메타버스 속에서 연인이 되기도 하고, 현실에서 만나서 연인이 되기도 한다. 메타버스 속에서 결혼을 하기도 하는데, 소셜 VR의 중요한 부분이 이런 ‘연애’에 있는 만큼 성범죄의 위험에는 언제나 노출이 돼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넷카마’나 ‘성범죄’ 같은 것을 떠나서 VR챗과 소셜 VR 서비스는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람들이 현실을 도피하고 있다는 편견을 갖기가 쉽다. 게임을 할 때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하는 것처럼 VR챗도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VR 헤드셋 자체가 스마트폰처럼 아무 곳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VR챗에 빠진 사람들은 집 밖을 나가 현실 세계의 사람을 많이 만나는 사람보다는 집에 콕 박혀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VR챗 사용자들의 50%는 매일 서비스에 접속한다고 한다.
크리에이터와 만난 메타버스
트위치 스트리머 ‘우왁굳’
‘방콕 아싸’들을 위한 서비스처럼 보이는 VR챗은 몇 년 전부터 큰 변화가 나타났다. 바로 1인 방송 크리에이터들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아프리카TV, 트위치 등으로 알려진 이런 1인 방송 크리에이터들 중에는 자신의 현실 모습과 신분을 숨기고 목소리만을 사용해 방송하는 사람들이 예전부터 많았다. 이런 사람들이 몇 년 전부터 ‘버추얼 유튜버’라고 해서 자신의 모습을 만화같이 생긴 아바타에 투영해서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이 아바타를 유니티엔진을 통해서 3D 아바타로 만들어서 VR챗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VR챗에서 시청자들과 만나기도 하고, 같이 게임을 하기도 한다. 이 내용은 당연히 1인 방송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송출이 된다. 기존에도 게임 속에서 시청자들과 만나서 게임을 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VR챗을 통해서 좀 더 인간과 인간이 직접 만나는 것 같은 소통이 가능해졌다. 현실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웬만한 일들이 다 VR 속에서 가능해진 것이다.
이런 활동으로 국내에서 가장 활발한 사람이 트위치 스트리머 ‘우왁굳’이다. VR챗을 활용한 상황극 콘테스트, VR챗을 활용한 예능 프로그램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모두 시청자들이 참여한 콘텐츠다.
VR챗에서 만나는 크리에이터와 시청자
이런 우왁굳의 시청자 콘텐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VR챗을 사용해야 하고 VR 헤드셋도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VR 헤드셋을 갖고 VR챗에서의 활동에 익숙한 시청자들이 고정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이런 ‘고정 멤버’가 된 시청자들은 점차 다른 시청자들에게 잘 알려진 크리에이터가 돼버렸다. 시청자가 우왁굳이 만든 메타버스 속에서 ‘배우 겸 코미디언 겸 1인 방송인 겸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돼버린 것이다. 이들이 계속 생산해내는 콘텐츠가 많아지고, 퀄리티가 좋아지면서 일반 시청자들의 유입이 늘어났고 이는 ‘왁타버스(우왁굳+메타버스)’라는 이름으로 점점 커지고 있다. 최소 5만명 정도는 될 것으로 추정되는 우왁굳 팬덤 사이에서는 ‘고정 멤버’를 비롯한 크리에이터들이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인’이다. 이처럼 크리에이터가 팬덤 커뮤니티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다시 이런 크리에이터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VR챗에 유입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VR챗 사용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다른 국가의 VR챗 커뮤니티와는 다른 한국만의 특징으로 보인다.
이처럼 왁타버스의 성공은 메타버스나 VR 소셜 서비스가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바로 크리에이터 이코노미다. 소셜 VR을 단순히 유저와 유저가 만나는 목적으로 사용했다면 ‘버디버디’나 ‘세이클럽’과 같은 채팅 앱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위에서 어딘가 음침한 현실 도피자들의 모임 같은 느낌을 벗기가 쉽지 않다. 반면 VR챗은 1인 방송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기 시작하고 계속적으로 이를 활용한 콘텐츠가 생산이 되고 있다. 이것을 보고 크리에이터와 팬이 계속 서비스에 유입되고 있다. 여전히 1인 방송 시장은 마이너한 시장이기는 하지만 유튜브의 영향력이 커지고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있는 만큼 그 미래는 밝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크리에이터가 만든 메타버스 경제
세계 최대 VR 시장인 ‘브이켓’
VR챗이 만들어낸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의 규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브이켓(Vket)이라는 행사다. 버추얼(Virtual)과 마켓(Market)을 합쳐서 브이켓인데, ‘브이켓 2022 겨울 행사’가 2022년 12월 3일부터 18일까지 VR챗 속에서 열렸다. 일본은 국가 단위로 봤을 때, 두 번째로 VR챗 사용자가 많은 시장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타쿠 문화와 서브컬처의 원조 국가답게 많은 유저들이 VR챗에 깊게 빠져 있다.
브이켓을 운영하는 회사인 히키(HIKKY)도 일본 기업이다. 이 회사는 2021년 65억엔 규모 시리즈A 펀딩에 성공하기도 했다. 원래 브이켓은 크리에이터가 만든 VR챗용 아바타나 물건을 판매하는 행사였는데 사용자가 많아지면서 큰 글로벌 기업들도 홍보 부스를 내고 있다. 이번 행사의 경우에는 야마하, 다이마루 백화점, 레노보, TV아사히, 소니, 디즈니플러스 등이 부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주최 측에 따르면 브이켓의 누적 방문자는 100만명 이상이라고 한다.
아바타는 돈이 된다
아바타 전문 스타트업도 등장
브이켓 외에 상시로 VR챗용 아바타가 판매되는 곳은 ‘부스’라는 일본의 크리에이터 마켓이다. 여기서 판매되는 3D 모델들은 대부분 VR챗용이다. 많은 버추얼 유튜버들이 부스에서 판매하는 아바타를 구매한 후 일부 수정하는 형태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크리에이터 경제와 결합되면서 아바타 시장은 점점 큰 시장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런 아바타들은 유니티엔진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여러 플랫폼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레디플레이어미’라는 아바타 회사는 2022년 8월 a16z 등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로부터 5600만달러의 시리즈B 투자를 받았다. 2021년에는 삼성넥스트가 이 회사에 투자하기도 했다. 이 회사의 아바타가 사용되는 주요한 서비스가 VR챗, 그리고 버추얼 유튜버들이 많이 쓰는 페이스 트레킹 서비스인 ‘애니메이즈’다.
오큘러스로 큰 성공을 거둔 메타
VR 산업의 아이폰이 되고 싶어 한다
메타버스·VR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는 메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최근 마크 주커버그는 메타 전체 투자의 20% 정도가 리얼리티랩(메타버스)에 사용된다고 밝힌 적이 있다. 메타버스에 많이 투자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메타의 기존 서비스인 소셜미디어나 AI에 투자되는 비중이 훨씬 많다는 취지의 설명이다. 이 20% 중 50% 이상이 AR(증강현실). 즉, 스마트 글라스 쪽에 투자되고 있다. VR 기기의 경우 집에서만 주로 사용 가능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에 스마트폰과 같은 대중화된 기기가 되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 같다.
나머지 절반 중 40%는 VR 쪽에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 등장한 메타퀘스트 프로가 대표적인 것 같다. 호라이즌 월드와 같은 소셜 VR에 투자되는 것은 겨우 10%다.
전체적으로 보면 메타는 애플이 아이폰에서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하드웨어 시장에서의 우위를 VR 시장에서 가져가려고 하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 아무리 사용자가 많아도 결국 애플의 정책 변화에 손을 못 쓰는 것을 보면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쪽을 장악하는 플랫폼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메타는 애플·구글처럼 자체적인 VR 앱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는데 최근 누적 매출이 15억달러를 넘었다.
2020년 10월 메타가 출시한 메타 퀘스트2(전 오큘러스 퀘스트2)는 출시 이후 1500만대가 팔리면서 VR 기기 시장의 판도를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퀘스트2는 PC와 연결하지 않아도 독립적인 기계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나 엑스박스처럼 일종의 게임 전용 머신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거다.
VR용 음악 게임인 ‘비트 세이버’는 2021년 한 해만 매출이 약 1억달러가 나왔다. 메타는 2019년 일찌감치 이 회사를 인수했다.
VR 헤드셋 보급은 꾸준히 확대 중
VR 기기에는 점차 많은 기업들이 뛰어들고 있다. 모두 메타 퀘스트2의 성공을 보고 뛰어든 것. 소니의 PS VR2가 2023년 2월에 출시될 예정이고, 바이트댄스(틱톡)가 인수한 중국 스타트업 피코가 본격적으로 글로벌 마케팅을 확대하고 있다. 이처럼 VR 기기 자체는 비트세이버, VR챗 같은 킬러 서비스들의 등장으로 점차 대중적인 저변이 넓어질 것이다.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소비자용 VR 시장이 69억달러 규모고, 2027년에는 200억달러로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메타버스라는 경계가 모호한 시장이 아니라 VR 헤드셋과 이를 통해 소비하는 콘텐츠 시장을 합친 규모다.
2021년 메타버스라는 유행어가 인기를 얻으면서 기존의 VR은 메타버스라는 큰 버즈워드 속에 파묻혔다. VR을 포함해서, 로블록스 포트나이트 같은 실시간 동시 접속이 가능한 3D 게임, 블록체인을 활용한 웹 3.0, 원격 근무가 가능한 버추얼 오피스까지 메타버스라는 큰 용광로 속에 여러 개념들이 뒤섞였다.
이제 메타버스의 거품이 빠지면서 이것들을 구분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VR챗과 같이 VR 헤드셋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서비스와 크리에이터 생태계는 메타버스의 부침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될 것 같다.
이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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