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난 것 세 가지와 남은 것 세 가지...‘버블’ ‘해이’ ‘FOMO’는 가라
테크의 시대 이제 끝났나
“빅테크들의 거대한 매출이 과거처럼 초고속으로 성장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 마이클 넬 UBS자산운용 선임 투자 애널리스트 >
금리가 상승하면서 테크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의 펀딩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테크 기업들의 실적이 나빠지고 대규모 해고가 시작됐다. 그리고 일반적인 대중들까지 피해를 볼 수 있는 테크 기업의 도산이 발생했다.
바로 암호화폐 거래소 FTX다. FTX는 단순한 크립토 기업이 아니다. 수많은 벤처캐피털(VC)과 테크 투자자들의 돈이 들어갔다. 한국에서는 VC들이 크립토 기업에 거의 투자하지 못했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막대한 돈이 크립토에 흘러 들어갔다.
FTX의 붕괴는 ‘테크의 시대’가 끝나는 상징적인 사건일까?
테크의 시대란 무엇인가
FAANG 빅테크의 시대
‘테크의 시대가 끝난 것인가’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테크의 시대’가 무엇이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을 기준으로 보자면 아이폰의 성공으로 애플이 2010년 부상한 때가 테크의 시대가 시작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이때쯤 미국 주식 시장 최상위에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가 올라왔다. 2013년에는 테슬라가 상위 10위 안에 올라오고, 2015년 페이스북(메타), 2017년 아마존이 10위 안에 들어왔다. 2021년 엔비디아까지 상위 20위로 올라오게 된다.
우리가 GAFA(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나 FAANG(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이라는 단어를 만들고 미국 주식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다. 하지만 단순히 순위로 보면 빅4(애플, MS, 구글, 아마존)의 지위가 드러나지 않는다. 미국 기업들의 시가총액 상위 10위에서 테크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알 수 있다.
2010년 구글, 애플, MS가 상위 10위에 있었고 이 회사들이 10개 회사 시가총액을 합친 것 중 44%를 차지했다. 이것도 적지 않은 규모다. 2017년에는 이 비중이 72%로 올라갔다. 2022년 초 빅테크 기업들의 가치가 천정부지로 오를 때는 상위 5개 테크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달했다. 2022년 11월에는 73%로 낮아졌다. 2017년에 상위 10위권에 있었던 페이스북이 탈락한 것도 있지만 과도했던 기업가치 격차가 정상적인 수준으로 좁혀졌다고 볼 수 있다.
네 곳이나 배출한 테크 섹터
테크 기업들은 실리콘밸리 즉 미국의 벤처 생태계와 밀접하게 연관이 돼 있다. 애플, 구글, 아마존, 메타 등이 모두 초기에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받았고 메타의 경우 역대 가장 성공적인 VC 엑시트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빅테크 기업들은 신생 스타트업들의 경쟁자면서 잠재적인 인수자기도 하다. 빅테크 기업와 스타트업은 인재를 두고서 경쟁하기도 하고, 빅테크에서 나온 사람들이 창업을 해서 스타트업을 만들기도 한다.
미국 시가총액 상위 기업 중 스타트업에서 막 올라온 기업들도 많다.
미국에서 시가총액 300위 안에만 들어도 30조원이 넘는 엄청난 큰 기업이다. 불과 10년 만에 30조원 가치의 기업을 만든다? 정말 엄청난 성장 속도라고 할 수 있다.
美 빅테크와 스타트업의 공통점
혁신을 만든 것은 기업 문화
빅테크 기업과 스타트업들의 초고속 성장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사람들이 봤더니 공통적으로 ‘기업 문화’가 다르다는 것이 발견됐다.
조직 구성원 간의 수평적인 소통, 규정과 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실질을 챙기는 것, 실패를 용인하고 오히려 독려하는 문화, 관행과 관료제, 사내 정치에 젖은 기존의 대기업들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문화다.
이 같은 문화는 단시간에 구축된 것이 아니라 1957년 페어차일드반도체의 설립에서부터 시작된 창업자, 벤처캐피털, 대학이 함께 만들어낸 문화다. 2010년 이후 가속화된 모바일과 소프트웨어, 그리고 저금리는 이런 문화와 만나 엄청난 혁신을 만들어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수용하고 빠르게 시도하는 문화는 빅테크 기업과 스타트업들을 성장시킨 가장 중요한 비결 중 하나다.
테크의 시대란 이런 실리콘밸리식 혁신 생태계와 기업 문화를 다른 기업과 국가들이 배우고자 했던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중국이 실리콘밸리 문화 이식에 성공했고, 정도는 다르지만 한국, 동남아, 인도, 유럽마다 실리콘밸리식 혁신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즉, 테크의 시대란 2010년 이후 가속화된 테크 기업들의 밸류에이션 상승과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어진 혁신 생태계와 문화의 전 세계 전파라고 정의할 수 있다. 매일경제가 실리콘밸리 특파원을 만들고 미라클레터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런 목적이 컸다. 그런데 최근에 만난 한 스타트업 대표는 이런 말을 했다.
“스타트업이 혁신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리가 올라가고 투자를 받지 못하는 기업들이 나오고, 주변 기업들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 보니까 혁신이라는 것도 결국 금리의 종속변수가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 많은 스타트업들이 투자자들의 돈을 방탕하게 쓰는 걸 지켜봤다. 과연 내가 창업을 한 것이 잘한 것일까? 혁신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은 그냥 금리가 낮아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그 대표가 갖고 있던 고민의 무게가 그대로 느껴졌다.
‘끝난 것’과 여전히 ‘남은 것’은 무엇일까.
(1) 밸류에이션 버블
금리의 상승은 모든 것의 가치를 바꿔놨다. 현금을 언제 벌어들일지 모르는 적자 테크 기업에 비해 따박따박 현금을 만들어내는 전통 기업은 투자자들에게 훨씬 매력적으로 보인다. 테크 기업이나 스타트업들이 말하는 ‘꿈의 가치’가 하락했다면 너무 냉정한 표현일까?
한 뉴스레터에서 이런 설명을 했다.
이제는 창업자들, CEO들이 말하는 미래에 대한 ‘신뢰’ 자체가 하락했다고.
원래 기업가치라는 것은 그 기업이 미래에 만들어낼 현금흐름을 현재로 반영한 것이다. 상장할 때만 해도 페이스북은 적자 기업이었고 그들이 가진 것은 수많은 고객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본격적으로 돈을 벌려고 하자 그 고객들은 엄청난 현금으로 돌아왔다. 모든 플랫폼 스타트업들은 페이스북을 예로 들면서 투자자들에게 고객을 많이 모으면 그걸 돈으로 전환하는 것은 쉬울 것이라고 얘기했다. 투자자들은 믿었다. 여전히 투자자들은 믿고 있다. 하지만 50%만 믿는다. 그만큼 테크 기업과 스타트업들의 가치는 하락했다.
(2) 자율을 넘어선 해이
매일매일 밝혀지는 FTX와 그 창업자 샘 뱅크먼 프리드에 관한 뉴스는 사람들을 충격에 몰아넣고 있다.
엔론의 파산관리인이었던 존 레이가 파산한 FTX의 CEO가 된 이후 내놓은 보고서는 모든 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고 있다. 42조원 기업가치의 비상장 기업이 이사회가 없는 것도 놀라웠지만 비용 통제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 고객의 돈을 꺼내서 직원들에게 퍼주고 그걸 제대로 기록하지도 않았다. 샘 뱅크먼 프리드가 처음 창업한 투자 회사인 알라메다리서치는 그에게 10억달러의 개인대출을 해줬다고 했다. 그 돈은 어디서 왔을까? 고객에게서 왔을 것이다. FTX 사태는 창업자들에게 주어졌던 무제한의 자유가 도덕적 해이와 방탕함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 번(2019년 위워크 사태) 보여줬다. 42조원 기업에서 지출 승인을 이모티콘으로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혁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3) FOMO 그리고 하이프 투자
FTX에 많은 돈을 태웠던 벤처캐피털들도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지금까지 실리콘밸리 최고의 스캔들로 꼽혔던 테라노스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유명한 투자자도 있었지만 FTX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FTX의 경우 세콰이아캐피털, 소프트뱅크, 블랙록, 타이거글로벌, 온타리오교원연금, 테마섹을 비롯해 실리콘밸리뿐 아니라 웬만한 유명한 글로벌 투자자들은 모두 포함돼 있다. 테라노스는 일반 소비자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FTX의 경우 채권자(피해자)만 1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FTX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 이 쟁쟁한 투자자들은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첫 번째, FOMO(Fear of Missing Out). 이 투자에서 소외되면 뒤처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실제로 2021년 6월 180억달러였던 FTX의 기업가치는 2022년 1월 320억달러가 됐다. 불과 7개월 만에 기업가치가 70%가 늘어난 건데, 이런 엄청난 수익률의 투자 기회가 있는데 이사회가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번째, 벤처캐피털들의 클럽 딜이 가진 허점이다. 충분히 성장한 벤처 기업이 가진 높은 리스크를 분산시키기 위해 벤처캐피털들은 리드 투자자 한 곳과 이를 따라오는 투자자들로 클럽 딜을 만든다. FTX도 시리즈B부터 시리즈C까지 10~20개 정도의 투자자들이 함께 들어왔다. 이처럼 공동의 위험 부담은 각자가 리스크 체크를 덜하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 이런 묻지마 투자 경향은 2021년 제일 극심했다. 유행(Hype, Buzzword)이라면 일단 묻지 말고 투자하는 일이 가장 많았다.
스타트업들이 유행하는 테마로 창업하거나 벤처 투자가 이런 주제에 이뤄지는 것은 사실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식 투자에서 ‘주도주’라는 이름으로 대세 상승을 타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오히려 안정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일부 테마들은 단순히 유행을 넘어 비이성적인 광풍이었다. 특히 해외에서 가장 극심했던 것은 크립토와 웹 3.0이었다. 토큰을 발행해 빠르게 현금화가 가능하다는 크립토의 특성은 엄청난 기회였지만 동시에 버블을 키우는 원인이 됐다. 이 같은 하이프 투자의 시대는 끝났고, 기관 투자자들에게는 치욕의 기록으로 남게 됐다.
남은 것: 빅테크, 기술, 문화
(1) 빅테크
빅테크 기업들의 밸류에이션은 꺼지고 있지만 빅4는 여전하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이다. 테크의 시대가 시작된 2010년에도 있었고 여전히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전통 기업이 있는데, 엑슨모빌, 버크셔해서웨이, 존슨앤존슨 같은 곳이다. 각각 에너지, 금융, 헬스케어를 대표하면서 세계 최고 기업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빅4도 이런 대기업의 지위를 유지할 것이다. 그것은 이 기업들이 끊임없는 혁신을 만들어간다는 점보다는 특정 시장을 사실상 독점·과점하고 있다는 점, 막대한 현금을 창출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대기업으로 오래 지배력을 유지할 것이다. 더욱이 이들에게 위협이 될지도 몰랐던 스타트업이나 소위 웹 3.0 기업들이 버블의 붕괴로 위기에 빠졌다는 것은 빅테크들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2) 기술이 만드는 미래
예전에 ‘19세기에 철도 기업’이 지금의 ‘테크 기업’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인류의 역사를 보면 혁신과 경제 성장을 만든 것은 모두 ‘기술’이었다. 과거에는 이 기술이 제조업을 바탕으로 하는 물리적인 기술이 주를 이뤘다면, 지금은 소프트웨어에서 시작해 바이오, 콘텐츠까지 형태가 정말 다양해졌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테크 기업들이 어디선가 또 나타나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에너지, 클린테크 분야의 기업들은 알게 모르게 투자를 받고 또 성장하고 있다. 2022년 10월에도 미국에서는 많은 기업들이 투자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소프트웨어 기업은 아니었다. 란자테크라는 클린테크 기업이 5억달러의 투자를 받았다. 이 회사는 탄소를 포집해 연료나 물질로 만드는 회사다. 또한, 폼에너지라는 회사는 4억5000만달러 투자를 받았는데, Iron-Air(산화철) 배터리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계속 테크 트렌드를 지켜보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3) 혁신 문화
테크 기업들의 문화는 다 100% 긍정적이기만 할까? 마이크로소프트는 사티아 나델라가 CEO가 되기 전에는 내부 정치와 사일로 문화로 악명이 높았다. 구글은 ‘Don‘t be Evil’이라는 초기 창업 정신이 없어지고 전형적인 대기업이 됐다는 얘기가 많다. 아마존은 빡세게 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테슬라는? 일론 머스크가 대표가 된 트위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 기업들의 일하는 문화를 우리가 배우려는 이유는 ‘효율적’이고 ‘유능하기’ 때문이다. 일에 있어서의 엄청난 솔직함, 그리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하는 문화는 테크 기업들을 가장 일 잘하는 기업으로 만들어준다. 스타트업들이야말로 이런 정신으로 움직이는 곳들이고, 물론 여기에는 성공에 대한 막대한 보상이라는 인센티브가 있다.
이런 기업 문화는 전통 산업에 속한 기업들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테크 기업과 전통 기업들의 밸류에이션이 좁혀진 이유 중 하나는 전통 기업들도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통해서 다양한 디지털 기술(클라우드, SaaS, 협업 툴)과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 어떤 회사가
·직급 체계를 줄이고 상사의 마이크로매니징(사소한 것까지 업무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팀원에 대한 코칭(응원과 육성)이 중요해졌다면
·팀원이 자신의 의견을 리더에게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면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월급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성장과 성취감을 위해서라면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아니라 객관적인 결과물로 성과를 평가받는다면
이미 그 회사는 실리콘밸리처럼 일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테크의 시대가 끝나고 고용 시장에서 기업이 유리해졌다고 과거와 같은 기업 문화로 돌아갈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한번 자유를 맛본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곳으로 갈 것이다. 우수한 인재를 붙잡기 위해서라도 기업들은 스스로의 문화를 바꿔가야한다.
이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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