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8) 중드 ‘겨우 서른’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3. 1. 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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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로우티를 마실 사람은 아니잖아?”
하이티와 로우티… 밀크티는 MIA? MIF?

“다기도 다 최고급이더라고요. 하지만 비싼 게 꼭 좋은 것은 아니죠. 잘 아는 사람들은 한눈에 디테일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을 거예요. 바로 저 식탁에서 애프터눈티를 마신 거죠. 원래 애프터눈티는 영국 왕실의 부인이 처음 시작한 건데 하이티와 로우티로 나뉘어요. 하나는 부인들을 위한 거고, 다른 하나는 평민을 위한 거죠.”(구자)

“내가 로우티를 마실 처지는 아니잖아요?”(왕부인)

“진짜 귀족가의 사람들은 로우티를 즐겼어요. 여기서 말하는 하이와 로우는 테이블의 높이를 말하는 거예요. 여유 있고 한가로운 사람들은 낮은 테이블과 소파를 갖추고 애프터눈티를 즐겼죠. 높은 테이블은 평민이나 하인이 이용했어요. 서둘러 마시고 일을 해야 하니까요.”(구자)

<겨우 서른>. 2020년 넷플릭스에 43부작 시리즈가 오르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중국 드라마다.

화려한 상하이 불빛 아래 오늘도 열심히 삶을 일구는 서른 살 세 친구 만니, 구자, 샤오친. 일도 연애도 가족 문제도 서툴고 어려운 게 많지만, 좌절하지 않고 희망도 놓지 않는다. 이제 겨우 서른이니! 못 할 일이 뭐 있겠어!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 1층에 위치한 명품 매장에서 시니어 판매사원으로 일하는 만니, 외동아들을 명문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무리해서 영끌해 그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로 이사 온 구자, 그 주상복합아파트 관리업체 직원으로 근무하는 샤오친. 셋의 좌충우돌 생존기 <겨우 서른>의 시즌1 7화에서 로우티와 하이티 얘기가 나온다.

용어부터 어렵다. 로우티는 무엇이고 하이티는 무엇인가. 말 그대로 로우티는 하급 계층이 마시는 티, 하이티는 상류 계층이 마시는 티가 아닐까? 그런데 실상은 완전 거꾸로다. 로우티에서 ‘로우’는 높이가 낮은 테이블을 가리킨다. 반면 하이티에서 ‘하이’는 높은 테이블을 의미한다. 호텔 라운지에 가면 높이가 낮아 식사하기는 어렵고 커피나 위스키 한잔 즐기기에 괜찮은 테이블이 즐비하다. 그 테이블이 바로 예전부터 귀족들이 차를 즐기던 ‘로우티’의 그 로우 테이블이다. 반면 ‘하이티’는 일반적인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 차를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 빨리 식사를 마치고 시중을 들어야 했던 하인 계층이나 일반 평민이 ‘하이티’를 즐겼다. 차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헷갈리기 쉬운 이 로우티, 하이티 얘기는 돈은 많지만 살짝(?) 무식한 왕씨 부인과 상류사회를 지향하는 중산층이면서 지식과 지성미가 넘치는 주인공 중 1명 구자를 극명하게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면이다.

아들의 명문 유치원 입학을 위해 무리하게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로 이사한 구자. 그러나 아들이 유치원 입학 인터뷰를 망쳐버리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빚어진다. 대안을 고민하던 구자에게 동아줄처럼 나타난 사람이 아파트의 최고층 펜트하우스에 사는 왕씨 부인이다. 모네의 수련을 고흐의 수련이라 할 정도로 무식한 왕씨 부인은 거실 한쪽을 다 채울 만한 크기의 수련 그림을 턱턱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력가다. 게다가 왕씨 부인 남편은 그 명문 유치원에 매년 몇 명씩 학생을 입학시켰을 정도로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런 왕씨 부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직접 만든 케이크를 가져다주고 왕씨 부인 모임의 디저트도 만들어주고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않는 구자. 그러나 왕씨 부인에게 구자는 여전히 이용해 먹고 팽~ 해도 상관없는, 자신의 추종자 중 한 명에 불과하다. 그런 왕씨 부인에게 구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돕자’고 협상카드를 내미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왕씨 부인이 주최한 애프터눈티 파티다.

1662년 영국 찰스 2세에게 시집 온 포르투갈 공주 캐서린 브라간자가 가져온 차 한 바구니에서 시작된 영국의 홍차 문화는 이후 애프터눈티 문화로 화려하게 꽃핀다.

19세기 초 영국의 귀족이나 상류 계층은 식사를 하루에 두 번만 했다. 오전 10시쯤에 아침을 먹고 오후 3시 전후에 근사하게 차려 저녁을 먹었다. 3시에 저녁을 먹으니 진짜 저녁이 되면 배가 출출했을 터. 그래서 7시경 ‘애프터 디너 티’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차와 간식을 준비해 먹었다. 이후 생활습관이 달라지면서 저녁 시간이 점차 늦어졌고 1850년경에는 7시 30분이나 8시까지 늦춰졌다. 아침과 저녁 사이 시간이 길다보니 그 사이에 무언가를 먹어야 했고, 그렇게 점심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점심을 먹더라도 지금과 비교해보면 저녁 시간이 늦긴 늦다. 그래서 오후, 더 정확하게는 오후 3~5시경에 차와 디저트를 챙겨 마시기 시작했고 이게 굳어진 것이 바로 영국의 ‘애프터눈티’ 문화다.

애프터눈티가 정확하게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베드포드 공작 7세의 부인 ‘애나 마리아’가 애프터눈티를 유독 즐겼고, 그녀에 의해 영국 사교계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귀족들은 낮은 테이블에서 은식기와 고급 도자기로 차를 즐기고(위), 하민 계층과 평민은 높은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은 그림에서도 종종 보인다(아래).
애프터눈티가 유행하면서 애프터눈티와 관련한 다양한 용어가 생겨났는데 ‘로우티’ ‘하이티’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 ‘리틀 티(little tea)’ ‘핸디드 티(handed tea)’ 등의 용어도 생겨났다. ‘리틀 티’는 애프터눈티가 보통 오후에 적은 양의 음식으로 준비됐기에 그렇게도 불렀다. ‘핸디드 티’는 여주인이 차를 차례로 돌린다는 의미다.
최근 낮은 테이블을 갖춘 카페가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SNS에는 ‘요즘 카페 의자, 테이블 근황’이라는 이런 유머스러운 ‘짤’도 많이 돌아다닌다. <사진 윤관식 기자>
다시 ‘하이티’와 ‘로우티’ 이야기로. 하이티와 로우티는 테이블 높이만 다른 것이 아니라, 시간도 다르다.

진정한 애프터눈티를 의미하는 로우티는 상류층과 귀족들이 밤늦게 시작되는 화려한 만찬을 기다리는 동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생긴 것인 만큼 오후 3~5시경에 주로 이뤄졌다. 반면 하이티는 노동자와 서민이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홍차와 함께 칼로리 높은 고기 등을 먹은 데서 유래한 만큼 주로 7시 이후 저녁 시간대에 진행됐다. 고기를 함께 먹는다 해서 ‘미트티’라고도 부른다.

결국 ‘로우티’는 일종의 간식 개념 티타임을 의미하고, ‘하이티’는 티타임이라기보다 ‘저녁을 먹으면서 차를 즐긴 것’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다.

뜨거운 차 넣고 우유 넣는 ‘MIA’ 우유 먼저 넣는 ‘MIF’

사용하는 도자기 무엇이냐에 따라 계층 간 차 문화 달라져

로우티, 하이티와 비슷한 것이 MIA와 MIF다.

MIA는 ‘Milk in After’의 약자, MIF는 ‘Milk in First’의 약자다. 쉽게 말해 차를 먼저 넣고 다음에 우유를 넣을 것인가(MIA), 우유를 먼저 넣고 차를 뒤에 넣을 것인가(MIF)다. “그게 그거지, 뭐가 달라” 할 수 있지만, 영국에서는 이게 국가적인 논쟁거리가 됐을 정도다. 결국 2003년 영국왕립화학협회가 나서서 “고온살균우유는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저온살균우유는 우유를 먼저 넣는 게 낫다”고 교통정리를 해주기도 했다.

‘그게 그거지’는 사실 훌륭한 품질의 도자기를 사용하는 현대인이기에 가능한 생각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그게 그거지’가 아니었다. 본차이나라 불리는 도자기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중국의 도자기를 본 서양은 환호했지만 직접 만들지는 못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알고 싶었지만 중국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비슷하게 흉내 내어 만든 서양 도자기는 중국의 뽀얗고 단단하고 강도 센 도자기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상류층은 차를 마실 때 값비싼 중국산 수입 도자기를 사용했다. 물론 평민층은 그러지 못했을 터. 이들은 영국산 도자기에 차를 마셨는데 품질이 떨어지는 영국산 도자기에 뜨거운 차를 부으면 그 온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깨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온 게 MIF, 즉 ‘우유를 먼저 넣은 후 차를 넣는’ 방식이다. 미지근한 우유를 먼저 넣고 뜨거운 차를 부으면 도자기가 깨질 염려가 없어서다. 당연히 강도 좋은 중국산 수입 도자기를 사용하는 상류층은 다구가 깨질 염려 없이 뜨거운 차를 먼저 붓고 우유를 넣는 ‘MIA’ 방식으로 차를 즐겼다.

귀족 흉내를 내는 아가씨가 차를 대접하는데 컵에 우유 먼저 따르는 모습을 본 이들이 이 아가씨가 ‘귀족이 아님’을 간파한다는 식의 스토리가 나온 배경이다.

요즘은 밀크티에 타르트 등 다양한 디저트를 곁들이지만 클로티드크림과 잼을 바른 스콘과 함께 서빙하는 게 정석이다.
MIA, MIF 외에도 스콘에 클로티드크림와 잼 중 무얼 먼저 발라야 맛있나 식의 소소한 논란이 존재한다. 이름부터 낯선 클로티드크림은 살균하지 않은 우유를 끓여 만드는 살짝 노란색의 뻑뻑한 크림이다. 우유를 끓인 후 몇 시간 동안 얇은 팬에 놔두면 크림이 덩어리를 형성하는데, 이게 클로티드크림이다. 보통 영국의 애프터눈티에는 스콘과 클로티드크림 그리고 잼이 빠지지 않는다. 스콘에 클로티드크림과 잼을 발라 먹으면 된다. ‘무얼 먼저 바르는가’ 같은 시시껄렁한 논쟁을 왜 하느냐고? 우리가 탕수육 ‘부먹’이 좋냐 ‘찍먹’이 좋냐 한창 논쟁했던 것과 마찬가지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시려나.

다시 <겨우 서른>으로 돌아가보자. 왕씨 부인에게 로우티와 하이티에 대해 얘기해준 후 구자는 이렇게 쐐기를 박는다.

“다른 여사님들의 오만함은 가문이 좋아서도 아니고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아서도 아니에요. 아는 게 많아서 나오는 오만함이에요. 여사님이 가지신 게 제게 없듯, 제가 가진 걸로 여사님을 도울 수 있어요. 여사님이 모임의 중심에 앉게 해드릴게요.”

하이티와 로우티를 구분하는 당신, MIA와 MIF 논쟁이 뭔지를 아는 당신은 이미 ‘아는 게 많은 분’ 반열에 들어섰다. 하이 소사이어티에 속해있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한껏 오만해질 것도 아닌데, 그깟 것 알아서 뭐하냐고? 그렇다고 하이 소사이어티 용어와 문화까지 굳이 모를 이유는 없지 않은가.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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