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퍼스펙티브] “옛것도 새롭다” 디지털 창고에서 보물 찾는 쾌감
가요·드라마·게임 등 ‘역주행’의 시대
음악은 보통 처음 발표됐을 때가 가장 인기고 시간이 흐를수록 하향곡선을 탄다. 대중음악의 숙명이다. 요즘처럼 무수한 음악이 쏟아져 나왔다가 금세 사라져 음악의 생애주기가 짧은 시대엔 더욱 그렇다. 히트를 못 했거나 발매된 지 오래된 노래가 갑자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역주행은 음악의 생애주기를 거스르는 일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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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최고 히트곡 ‘사건의 지평선’
라이브 영상, SNS 소문 타고 폭발
외국선 37년 만에 1위 오른 노래도
과거와 현재 섞인 유튜브 영향 커
추천 알고리즘, 디깅 컬처 등 결합
“나만의 취향 즐긴다” 갈수록 확산
」
17년차 가수 윤하의 재발견
세계적 K팝 아이돌이 경쟁한 지난해 하반기 음원 차트에서 정상에 선 노래는 싱어송라이터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었다. 데뷔 17년차 실력파 가수지만 마니아 팬이 많았던 윤하가 톱 아이돌을 누르며 역주행 신화를 썼다. ‘사건의 지평선’은 지난해 3월 발매된 정규 6집의 타이틀곡이다.
발매 당시엔 별 반응이 없다가 대학축제나 음악 페스티벌에서 찍은 라이브 직캠들이 유튜브·SNS 등에 퍼지고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윤하의 가창력과 무대 매너가 호평받았고, 발매 6개월이 지나 역주행 시동이 걸리더니 7개월째 음원 1위를 찍고 장기 독주에 들어갔다. 2022년 멜론의 최장기 1위 곡이다. 15년 만에 지상파 음악방송 1위까지 한 윤하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모든 게 몰래카메라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앞서 2021년에는 또 다른 역주행 신화 브레이브 걸스가 있었다. 그룹 해체를 눈앞에 둔 시점에 2017년 곡 ‘롤린(Rollin)’을 군 위문공연에서 부른 영상이 유튜브 등에서 터지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2PM의 ‘우리집’은 멤버들의 ‘군백기(군공백기)’에 오히려 멤버 직캠과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급상승하며 팀의 완전체 복귀를 도왔다. 아이유가 10대에 쓴 첫 자작곡 ‘내 손을 잡아’도 콘서트 앙코르곡으로 부르는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10여년 만에 음원차트 최상위권에 안착했다.
지난해 12월 7년 만에 재결합해 데뷔 15주년 기념 음반을 낸 카라는 타이틀곡 ‘웬 아이 무브(When I Move)’를 1위에 올리며 ‘스텝’ ‘미스터’ ‘루팡’ 등 과거 히트곡까지 줄줄이 불러냈다. 유튜브와 SNS 등 달라진 소비환경이 ’사건‘이던 역주행을 더욱 빈번하게 하고 있다.
넷플릭스 인기작 타고 차트 석권
지난해 6월에는 영국의 전설적인 뮤지션 케이트 부시의 1985년 곡 ‘러닝 업 댓 힐(Running Up That Hill)’이 세계 주요 차트 1위에 오르며 37년 만의 역주행에 성공해 화제가 됐다. 발표 당시에는 빌보드 싱글 차트 30위가 최고 성적이었으나 영국 오피셜 차트 1위, 빌보드 싱글 4위, 빌보드 글로벌 200 1위, 미국 아이튠스 1위, 스포티파이 1위 등의 대기록을 세웠다. 리메이크가 아닌 37년 전 오리지널이 낸 성과라 더욱 눈길을 끌었다.
비결은 넷플릭스 최고 화제작의 하나인 ‘기묘한 이야기’ 시즌 4에 수록되면서다. 1980년대 미국의 가상 소도시 배경에 ‘뉴트로(뉴+레트로)’ 코드를 녹인 ‘기묘한 이야기’는 80년대 올드팝을 절묘하게 활용했고,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전 세계에 80년대 음악 다시듣기 붐을 불러일으켰다. 2016년 시즌1에 나온 토토의 ‘아프리카’는 드라마를 통해 노래를 알게 된 미국 소녀가 트위터에서 ‘아프리카 리메이크 캠페인’을 벌였고, 미국 밴드 위저의 리메이크곡이 빌보드 100위에 오르기도 했다.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선구자인 부시는 2014년 마지막 공연 후 은둔 중이었는데 성명을 내고 “‘기묘한 이야기’의 젊은 팬들이 내 노래에 완전히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엄청난 애정과 지지에 압도됐다”며 남다른 마음을 전했다.
웹소설·웹툰·드라마 등 동반 히트
역주행은 음악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대중문화 전반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최근 ‘메이플 스토리’ ‘애니팡’처럼 오래된 게임이 대형 업데이트나 스타 마케팅에 힘입어 신규 게임을 제치고 역주행하며 클래식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하나의 IP(지식 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 rights)가 웹소설·웹툰·드라마·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재탄생하면서 리메이크 팬들이 원작이나 타 장르를 찾아보다가 역주행하기도 한다. 일종의 ‘IP 유니버스 속 장르교차 역주행’다.
지난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한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은 드라마 인기가 원작 웹소설의 인기로 이어졌다. 2018년 완결된 웹소설 매출이 드라마가 흥행하면서 한때 230배나 뛰었다.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인기를 끌자 박해영 작가의 전작 ‘나의 아저씨’(tvN·2018)를 찾아보는 이들이 생기고, 두 드라마가 동시에 넷플릭스 톱10에 들기도 했다.
과거 되돌아보는 뉴트로 열풍
역주행의 대전제는 디지털 시대 거대한 콘텐트 아카이브와 맞춤형 구독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다”는 말처럼 자주 듣는 말이 없다), 그리고 디깅(digging·특정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는 것) 컬처다. 이는 과거를 새롭게 재해석·재조명하는 ‘뉴트로’ 열풍으로도 이어진다.
최근 국내 뉴트로 트렌드는 8090에 이어 Y2K(2000년대 초 스타일)로 넘어왔다. 유튜브라는 망망대해에는 80년대 음악이, 90년대 드라마와 2000년대 예능 짤이 실시간 영상과 동시에 돌아다닌다. 유튜브가 전 세계에 K팝을 전파하며 공간의 벽을 넘어뜨렸다면, 엄청난 콘텐트 아카이브는 현재와 과거를 뒤섞으며 시간의 벽도 무너뜨린다.
유튜브 속 무궁한 콘텐트들은 이용자들에게 지금 새롭게 쏟아지는 음악들과 거의 동시대 콘텐트로 소비된다. 또 예전 같으면 가수가 활동을 쉬면 소비도 멈췄지만, 이제는 뮤직비디오나 영상 콘텐트 조회 수는 활동 여부와 상관없이 꾸준히 올라간다.
불황의 시대, 행복은 어디에 있나
여기에 디깅까지 더해지면 ‘첨단기술의 고고학’이 탄생한다. 채굴·발굴을 의미하는 디깅은 원래 DJ들이 자신의 라이브러리를 채우기 위해 핫한 음악을 찾아다니는 행위를 뜻했다. 최근에는 음악을 넘어 특정 분야나 취향에 적극적으로 몰입하고 소비하는 행위,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원석을 발굴할 때까지 깊이 파고드는 행위로 확장됐다.
습관적으로 남들이 많이 듣는 ‘핫 100’을 따라 듣기보다, 추천 영상을 타고 파들어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에 눈뜨거나 특정 가수나 배우, 감독과 작가 등 최애의 필모그래피를 후벼 파면서 나만의 리스트를 만드는 새로운 소비 방식이다. 마치 고고학자처럼 디지털 아카이브에 묻힌 보석을 찾아내 역주행 롤러코스터를 태우는 마법 같은 일도 여기서 벌어진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 등은 책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올해 10대 트렌드의 하나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디깅 모멘텀(digging momentum)’”을 꼽았다. 또 디깅족은 자기만족에 그치는 오타쿠나 덕후와 달리 소통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몰입 행동의 발전된 새 버전”으로 평가했다.
김 교수 등은 “디깅러들이 단지 취미에 진심인 것만은 아니”라며 디깅은 “‘멀티 페르소나’ 시대에 ‘찐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이자 코로나 사태와 불경기 속에서 실존적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만의 행복 전환점을 찾으려는 삶의 매진”이라고 강조했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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