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새해 아침 큰 만두를 먹는다, 잠시나마 위대해진다

2023. 1. 5.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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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나만의 신년 예식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전보다 더 많은 편의를 누리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작아졌다. 영웅은 역경과 더불어 탄생하는 법, 전보다 안락해진 생활 속에 위대함이 깃들 처소는 없다. 전보다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왜소해졌다. 영웅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 탄생하는 법, 창조 아닌 소비 속에 위대함이 깃들 처소는 없다. 전보다 더 오래 살게 되었지만, 사람들이 전보다 더 위대해졌다는 징후는 없다. 대의를 위해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 영웅이 탄생하는 법, 가늘고 긴 인생에 위대함이 깃들 순간은 없다.

이렇게 사람들은 작아져 간다. 연말이 되면 더 작아져 간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시간은 예상보다 빨리 흘렀고, 이룬 것은 많지 않다. 초조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한파에 그을린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본다. 아아, 마침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노화가 왔구나!

옛날보다 편해졌으나 작아진 세계

그래도 새해가 밝으면 또 한 해를 살아내야 한다. 험난한 한 해를 다시 헤쳐나가려면 연말에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영혼을 부풀려줄 웅혼한 기상이 필요하다. 수명과 소비와 편의시설로 가득한 이 세상 어느 구석에서 위대함을 꿈꿀 것인가.

「 킹콩이 헬기 삼키듯 우적 씹어야
현재보다 더 큰 것과 하나된 기분

사람들이 점점 왜소해지는 시대
웅혼한 기상은 사라지는 것일까

또 한 해 살아낼 기운 얻으려면
우리 각자의 작은 의식도 필요해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현대 사회에서 제국을 꿈꾸는 정치가는 미친놈일 것이다. 작품을 무조건 크게 만들어서 관심을 끌려는 예술가는 삼류일 것이다. 쿠데타를 꿈꾸며 단두대를 만드는 이는 망상가일 것이다. 세계를 누비면서 위대한 탐험가가 되기에는 해외여행조차 너무 흔해졌다. 옛날보다 편해졌으나, 모두가 일제히 작아진 이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위대해질 수 있나.

그래서일까. 신년을 맞아 사람들은 해돋이를 보러 간다. 자, 새벽을 가르며 운전하여 동해 바다까지 가보는 거다. 영웅을 꿈꾸는 소년처럼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는 거다. 이제 곧 신년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해에게서 소년에게, 아니 해에게서 시민에게. 일 년에 단 한 번, 촛불 아니 태양은 보통 사람도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실로 아름답지 않은가, 붉게 타오르는 둥근 해는. 어둠을 가르고 만물을 데우는 불덩이를 보면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영혼의 기지개를 켠다.

나는 해돋이를 보러 동해에 가지 않는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 굳이 일찍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일을 하기에는 나는 너무 잠을 좋아한다. 잠이 온다는 것은, 내가 존재의 긴장을 풀었다는 것, 실수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 무장해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잠시나마 나는 세상과 조용히 화해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은 이 마당에 해돋이가 다 뭐람. 한숨이라도 더 자서, 새해라는 버거운 진실을 마주할 시간을 늦추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신년을 맞아 웅혼한 기상이 필요하지 않단 말인가. 그럴 리가. 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란 녀석의 멱살을 쥐고 또 한 해 동안 인생길을 떠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도 웅혼한 기를 받기 위한 나만의 예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신년이 되면 만두를 먹는다. 해돋이를 보는 대신 만두를 먹는다. 그것도 아주 큰 만두를 먹는다. 떡국이야 그저 거들 뿐.

동해 해돋이보다 만두가 좋은 이유

나의 만두 사랑은 역사가 깊다. 요즘 아이들은 뭐하고 노나. 해외여행을 하며 글로벌 리더가 될 야무진 꿈을 꾸며 노나. 아니면, 21세기의 나폴레옹이 되어 세계 정복을 꿈꾸다가 세인트헬레나로 유배 가는 꿈을 꾸며 노나. 해외여행이 아직 자유화되지 않던 어린 시절, 아이들에게는 외국 우표 수집이 유행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수도 알아맞히기를 하며 놀았다. 그 당시는 그랬다. 해외에 나갈 기회가 아예 차단된 환경에서 비로소 가능한 보다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 영국의 수도는 런던, 일본의 수도는 동경…. 이런 것은 쉽다. 의외로 틀리기 쉬운 것은 미국의 수도다.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 아니라 워싱턴 디씨이니까. 그 많은 나라의 수도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수도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였다. 인류의 위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히말라야로 가는 입구여서가 아니었다. 나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의 발음을 사랑했다. 카트, 만.두.

만두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만두만 해도, 교자(餃子), 만터우(饅頭), 샤오롱바오(小籠包), 바오쯔 (包子), 춘권(春捲), 훈툰(雲?), 궈티에(鍋貼)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만두들의 맛과 모양, 조리법은 모두 다르다. 특히 만터우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만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많은 만두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두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겨울에 만들어주곤 했던 엄청나게 큰 만두다. 이 큰 만두는 피부처럼 희고 고운 만두피와 전두엽처럼 잘 다져진 만두 속으로 나눌 수 있다. 만두피는 섬섬옥수처럼 말랑말랑해야 하고, 만두 속에는 섬세하면서도 풍부한 지식처럼 돼지고기, 두부, 다진 김치가 충분히 들어가야 한다. 재료를 아낀다는 느낌이 있으면 절대 안 된다. 그것은 실패한 만두다. 그것은 좌절한 만두다. 어떤 과함. 어떤 초과. 어떤 흘러넘침이 이 만두의 특징이다. 이 커다란 만두는 신산한 삶을 살아온 연장자가 더 잘 만들 것 같은 음식이다.

미미한 존재가 거인으로 변신

내가 사랑하는 이 만두는 반드시 커야 한다. 그래야 먹는 사람이 잠시나마 위대해질 수 있다. 웅혼한 기상을 가질 수 있다. 공룡이 헬기를 입안에 집어넣는 기분으로 그 큰 덩어리를 입에다 밀어 넣고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우리의 현존재보다 더 큰 어떤 것과 합일되는 느낌이 온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체험이다. 미미한 존재가 크나큰 존재를 매개로 하여 마침내 조금이나마 위대해지는 체험이다.

만.두. 일단 발음부터 크다. “만”의 “ㅏ”음과 “두”의 “ㅜ”음이 이어져서 만드는 “만두”라는 소리는 뭔가 넉넉하다는 인상을 확연히 준다. “만두”가 아니라 “민도”라고 발음해보라. 뭔가 작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민도가 아니라 만두다. “교자”의 발음도 크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교’자에는 불필요한 교태가 흘러넘친다. 그에 비해 ‘만’은 대개 큰 것과 관계가 있다. 천하장사 이만기라는 이름에도 ‘만’자가 들어 있다. 고려시대에 반란을 일으킨 노비 만적의 이름에도 ‘만’자가 들어 있었다.

만두가 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끓이는 과정이나 먹는 과정에서 반드시 만두 한두 개가 찢어진다. 이것은 의도된 혼란이요, 계획된 무질서다. 반드시 만두 하나둘은 찢어져야 한다. 찢어져서 만두 속이 흘러나와야 국물이 간간해진다. 요리사는 그렇게 될 것을 감안해서 국물 간을 조정해야 한다, 만두피의 파국을 감안해서 국물 간을 조정하는 요리사는 무질서를 감안하며 치안을 설계하는 명민한 정치인을 닮았다.

자, 만둣국이 다 끓었다. 이제 만두를 집어 입에 넣는다. 만두가 한입에 다 넣기 어려울 정도로 큼직하기 때문에, 만두를 베어 문 입안에 기분 좋은 압박감이 가득하다. 집에 욕조가 있는 사람도 왜 굳이 대중탕에 가곤 하는가. 집안의 욕조는 큰 탕에 들어갔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큰물의 압박감이 없기 때문이다. 만두가 입안에 주는 그 압박감이야말로 만두를 크게 빚어야 할 이유다. 만두에 의해 내 입이 유린당하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

가성비·생필품보다 중요한 것

만두가 입에 다 들어갔는가? 그럼 이제 씹는다. 고층 빌딩에 올라간 킹콩이 헬기를 씹어 삼키는 것처럼 만두를 우적 씹어야 한다. 입에 퍼지는 그 심오한 맛을 느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거다. 추운 겨울에 커다란 만두피에 싸이는 상상을 하라. 본인 스스로가 만두가 되는 상상을 하라. 그리고 거인의 입 안으로 삼켜지는 상상을 하라. 거인의 입에 들어가 거인의 일부가 되는 상상을 하라. 커다란 만두를 먹는 일은, 이제 거의 아무도 위대한 거인이 될 수 없음을 자인하는 행위이며, 인간이 난쟁이임을 직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거인이 되었던 이를 추억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는 너무 가성비라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꼭 필요한 가격을 내고 꼭 지불한 만큼만 누리려고 든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생필품 이상이 필요하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장자(莊子)는 일찍이 이렇게 반문한 적이 있다. 인간에게는 발로 밟을 정도의 땅만 필요한 것 같지만, 정말 그 정도 땅만 남기고 나머지 땅이 다 없어져 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사람들이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딱 밟을 정도보다 더 크고 넓은 땅덩어리가 필요하다. 사람이 편히 누워 자기 위해서는 딱 누울 정도의 침대만 필요한 게 아니다. 자기 몸보다 더 크고 넓은 침대가 필요하다. 자기보다 큰 것의 일부로 존재할 때야, 인간은 비로소 심신의 기지개를 켤 수 있다.

점점 위대하고 거대한 것을 경험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간다. 그 덕분에 세상이 더 평화로워지고 정의로워진다면 그까짓 위대함이 대수랴. 다만 한때 존재했던 거대함을 추억하기 위해 나는 신년이면 만두를 먹는다. 흘리면서 먹는다. 소영웅처럼 먹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또 한 해를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포만감을 얻는다. 이제 그만 먹어야 할 때를 아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는데, 만두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신년에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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