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결혼 허락한 날, 그 표정 여전히 또렷한데 [이태원참사_희생자]
[소중한, 유성호 기자]
▲ 이태원 참사 희생자인 이주영씨 아버지 이정민씨가 가족 여행에서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
ⓒ 유성호 |
아빠는 싱숭생숭했다. "한번 데리고 와봐." 이 말을 하면서도 왠지 달갑지 않았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었던 터라 뒤숭숭한 마음을 좀처럼 정리할 수 없었다. "그날 약속이 있네." "그날은 안 되겠는데." 아빠는 자꾸 미루고 또 미뤘다.
엄마에게 털어놨다는 주영씨의 서운함이 아빠의 귀에도 들어왔다. 아빠도 더는 "튕길 수" 없었다. 그날이 왔다. 아직 고르지 못했던 마음을 누르고 아빠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집으로 오라고 했을 땐 이미 허락한 거야."
그 순간 아빠의 눈에 주영씨 얼굴이 들어왔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행복한 표정. 딸의 맑은 얼굴을 보자 아빠의 가슴도 벅찼다.
아빠도 하나둘 준비에 나섰다. 사춘기 때 너무 엄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결혼식 전날 꼭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결혼식 당일 '용돈 달라고 하지 않기' 같은 내용을 담아 깜짝 부모 서약서를 발표할 상상에 그저 흐뭇할 뿐이었다.
그런데 주영씨가 세상을 떠났다.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결혼을 준비하던 딸은 스물아홉 생을 마감했다. 주영씨의 꿈과 삶을 담담히 이야기하던 아빠는 결혼을 허락하던 날 딸의 표정을 떠올릴 때만큼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태원 참사 후 해가 바뀐 지난 2일, 주영씨가 일하던 사무실에서 아빠 이정민씨를 만났다.
▲ '대장'이란 별명처럼 주영씨는 어릴 때부터 똑 부러졌다. 좋아하는 일 앞에선 주저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은 것엔 단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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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아빠의 귀에도 "딸입니다"라는 말이 들려왔다. 아빠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딸을 너무도 바랐던 부부였기에 아빠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주변에서 아무리 못마땅하게 쳐다봐도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없이 소중했던 주영씨는 그렇게 엄마아빠 품에 안겼다.
'대장'이란 별명처럼 주영씨는 어릴 때부터 똑 부러졌다. 좋아하는 일 앞에선 주저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은 것엔 단호했다. 초등학생 때는 갑자기 선거에 나간다며 그 자리에서 뚝딱뚝딱 피켓을 만들어 집을 나섰고, 고등학교 땐 댄스 동아리를 이끌기도 했다. 장례식장을 찾은 주영씨 친구들은 "우리가 많이 의지했던 친구"라고 그를 떠올렸다.
▲ 이태원 참사 희생자인 이주영씨 아버지 이정민씨가 딸이 직접 제작한 상품들을 보며 "올해부터는 정말 날개를 달 상황이었는데... 본인 잘못도 아니고 이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꿈이 꺾여버렸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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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고 싶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요. 또 본인의 결과물이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이 돼버리는 상황에 실망도 한 것 같고요. 사업을 한다기에 처음엔 만류했는데 차곡차곡 준비하는 모습에 더는 말리지 못하겠더라고요. '몇 년 하다가 두 손 들더라도 고생도 교훈이니까'라는 생각이었죠. 근데 계속 견디고 잘 버티더라고요."
2022년은 주영씨에게 도약의 한해였다. 3년여 성실히 일한 덕분에 그가 디자인한 제품이 입소문을 탔고 내로라하는 대형 서점에 입점하기도 했다. 아빠는 주영씨가 이뤄온 성과와 소망했던 꿈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딸이 떠난 후 남은 기록들을 보니 그 동안 정말 고생했더라고요. 딸이 집에선 고민을 털어놓는 성격이 아니어서 잘 몰랐는데 아마 엄청 힘들었을 거예요. 올해부터는 정말 날개를 달 상황이었는데... 본인 잘못도 아니고 이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꿈이 꺾여버렸으니 얼마나 억울할까요."
▲ 이태원 참사 희생자인 이주영씨 아버지 이정민씨가 딸의 결혼을 허락했던 날을 회상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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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를 마친 아빠는 손흥민 선수가 뛰는 프리미어리그 축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갑자기 부산해졌다. 아빠는 딸 남자친구 목소리가 들리는 휴대전화를 황급히 건네받았다.
"주영이가... 주영이가..."
"무슨 일이야? 침착하게, 차분히 이야기해!"
아빠는 순간 교통사고가 난 걸로 생각했다. 근데 딸 남자친구 입에서 병원 이름이 아닌 "이태원"이 튀어나왔다.
"이태원으로 오셔야 해요!"
"갑자기 웬 이태원이야? 정신 차리고 병원 이름 이야기해!"
뭔가를 찾아보던 아들이 "일단 이태원에 가야 한다"며 부모님 손을 이끌었다. 그때 처음 아빠는 이태원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태원으로 가는 동안 아빠는 '괜찮을 거야'란 생각을 되뇌었다.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을 때도, 인근에서 클럽 음악이 흘러나오는 걸 들었을 때도 아빠는 큰일이 아니겠거니 했다. 하지만 '이태원역 1번 출구'에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이 자꾸 몰려왔다. 현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고 아빠는 고함을 치고 인파를 뚫고서야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빠는 해밀턴호텔 빈 상가의 통유리 너머로 딸의 모습을 확인했다. 남자친구는 딸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끌어안고 울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빠는 자신을 막아 세우는 경찰과 소방관, 의료진을 향해 "빨리 병원으로 옮기라"고 외쳤다. 딸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아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흘렀다. 딸을 이송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병원에 가겠구나' 생각하며 구급차를 따라나섰는데 도착한 곳은 체육관(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이었다. 그제야 딸의 죽음을 인지한 아빠는 무너지고 말았다.
아빠를 비롯한 가족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이 트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물어보고, 아무리 기다려도 딸을 만날 수 없었다. 또 한참이 흘러서야 "한남동주민센터에 가서 실종신고를 하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부모가 여기 와 있는데 무슨 실종신고냐"는 항의도 소용없었다.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실종신고를 한 뒤 아들의 설득 끝에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기다림이 시작됐다. 수소문 끝에 늦은 오후가 돼서야 딸을 의정부의 한 병원으로 이송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곧장 병원에 도착했지만 전혀 연고가 없던 의정부에서 딸을 데려오는 것도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경찰은 검사의 승인을, 검사는 대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와중에 검사는 부검 이야기도 꺼냈다. 늦은 밤에야 가족은 딸을 옮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악몽 같은 시간이었어요. 순식간에 아이를 잃고 제대로 판단조차 할 수 없던 상황에서 이리 불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고... 그나마 이태원에서 아이를 발견한 저희는 괜찮은 편에 속했더라고요. 그렇지 못했던 유족들은 사방팔방 쫓아다니면서 미친 사람처럼 아이를 찾아다녔더라고요.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국가가 참 무능력했죠. 우리보다 더 갈팡질팡, 우왕좌왕 했던 거예요. 컨트롤타워가 없었다는 말이 딱 맞아요."
▲ 이태원 참사 국조특위 현장조사 첫날, 유가족 "이제 겨우 한 발짝 내디뎠다. 성심 다해 달라" 국회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첫 현장조사에 나선 지난 12월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경찰청 앞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인 이주영씨 아버지 이정민씨(왼쪽 네번째)와 유가족,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산하 진상규명 시민참여위원회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서울경찰청과 서울시에서 밝혀져야 할 주요한 사항을 제시하며 철저한 현장조사를 촉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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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부가 유족들을 다 모으리라 생각했어요.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지 못했으니 대통령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따뜻한 손을 내밀 줄 알았어요. 그게 당연한 그림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모두가 맞다 생각하는 그 길을 안 가는 거예요. 왜 이태원 참사로 정권의 안위가 흔들린다고 생각하는지 참 이해하기 힘들어요. 정권에 악재가 되진 않을까? 지지율이 떨어지진 않을까? 얼마나 구태하고 미련한 정치인가요. 우리가 반정부 투쟁을 할 것도 아닌데 우리를 방해 세력으로 보고 편을 쫙 갈라버렸어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으면 더 많은 지지를 받았을 텐데요."
아빠는 정부의 이 같은 태도가 2차 가해 범람의 주된 이유라고 강조한다.
"정부의 기조와 2차 가해를 저지르는 사람의 태도가 일맥상통해요. '우리가 뭘 잘못했냐'는 정부의 입장이 '놀러 갔다 죽었는데 왜 그러냐'는 극우세력의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녹사평 분향소 옆에서 끊임없이 저희를 조롱하는 단체들을 보면 무슨 권력기관 같아요. 우리가 2차 가해를 막아달라고 무수히 하소연했고 행정안전부, 서울시청, 경찰까지 그러겠다고 했지만 눈썹 하나 까딱 안 해요. 아무리 원수라도 상갓집에선 예의를 갖추거든요. 그것마저 무너진 모습에, 오히려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는 정부여당의 모습에 유족들이 무너지는 거예요."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는 "이런 일이 또 생길 것이란 우려"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든다.
"지금 정부는 우릴 철저히 외면하고 있어요. 대응이 아니라 외면이요.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죠. 싸움도 박자가 맞아야 하잖아요. 서로 주장을 펼치다 보면 일이 풀리기도 하고요. 나라는 성장했는데 정치는 퇴보하니 저는 또 이런 사고가 날 거란 우려가 들어요. 다음 사고를 막기 위해선 원인을 규명해야 하는데 정부가 아예 그런 요구조차 무시하고 있잖아요. 정말 걱정입니다."
▲ 이태원 참사 희생자인 이주영씨 아버지 이정민씨가 딸의 빈자리에 고개를 떨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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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참사 희생자인 이주영씨 사무실의 탁상달력에 발주, 출고, 확인, 세팅 등의 계획된 일정이 적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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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주영씨가 직접 디자인한 고양이 캐릭터. 집에서 기르는 흰색·검은색 고양이 두 마리가 모티브가 됐다. |
ⓒ 소중한 |
폐업신고를 했지만 아빠는 당분간 사무실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여전히 11월인 딸의 달력 또한 넘기지 않았다. 아니, 넘기지 못했다. 사무실을 임대한 후 딸과 함께 만들었던 철제 보관대를 어루만지며 아빠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주영아, 2023년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사업도 더 발전했을 건데 어이없게도 그만 멈춰버렸네. 아쉬움 때문에 네가 쉽게 가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어 아빠는 고민이 많다. 네 아쉬움을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네가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아빠 꼭 지켜봐 줘. 우리 가족 모두 죽을 때까지 널 기억할게."
인터뷰를 마친 후 아빠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힘주어 말했다.
"제가 20대일 땐 마음껏 놀러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럴 환경이 아니었죠. 청년들이 어딘가에 모이면 오히려 정부가 폭력을 휘둘러 와해시킬 때였죠. 20대에 최루탄을 마시며 산 이유는 딱 한 가지였어요. 청춘들이 편하게 쉴 수 있고, 맘 놓고 놀 수 있는 안전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죠. 저는 싸워서 얻어냈다고 생각했어요. 경제가 부흥하고, 청춘들이 자유롭게 소신을 밝히고, 어디든 놀러 갈 수 있는 나라가 됐다는 자부심도 있었죠.
그런데 몇십 년이 흘러 이렇게 안전하지 못한 나라를 눈으로 목격하고 전 무너졌어요. 많은 사람들이 '놀러 가서 죽었다'고 하는데 놀러 가서 죽으면 안 되는 거예요. 놀러 가서 죽는 그런 나라는 절대 있어선 안 되죠. 그런 말을 하는 분들에게 정말 당부드리고 싶어요. 그게 우리 청년들에게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고 죄스러운 말인지 가슴 깊이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 나이 들어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20대 때처럼 안전한 대한민국을 위해 다시 목소리를 높여야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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