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시한부 말기암 해외동포의 마지막 버킷리스트

조욱래 2023. 1. 4.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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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파독광부 출신 캐나다 교민 박옥규씨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조욱래 기자]

[기사 수정 : 4일 오후 5시 18분]
 
▲ 버킷리스트를 설명하는 박옥규씨  박옥규씨가 온타리오주 런던 중심가에 위치한 스프링뱅크 공원(Springbank Park)에서 자신의 인생수기 출판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조욱래
"내 인생을 가만히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기적같은 삶이었다. 말기암 판정을 받아 덤으로 사는 인생을 실감하면서, 세상과 이별하기 전 아내와 했던 기부약속을 완수하고 열정을 다해 산 우리 부부의 인생 스토리를 후대에 전하고 싶다."

대장암 등으로 20년 가까이 투병 중인 교민 박옥규(83·캐나다 런던 거주)씨는 4년 전 아내를 허망하게 떠나보낸 뒤 최근엔 6개월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삶에 대한 의지가 활활 타오른다.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어서다.

최근 코로나에도 감염됐던 그는 몸이 불편한 와중에도 장장 6시간의 인터뷰 동안 지친 기색 한 번 보이지 않았다.

폐암으로 갑자기 세상 떠난 아내의 유언

"우리 가족에게 전부였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유언을 마무리 짓고 마지막으로 나의 버킷리스트를 완수하고 싶다."

1965년 3월 그리운 가족과 고향을 뒤로 하고 독일로 떠난 그는 3년 동안 광원으로 일하다 지인의 도움으로 뜻밖에 캐나다 이민에 성공했다. 1968년 11월 단돈 75달러를 손에 쥐고 토론토에 도착한 박씨 부부는 다음해 4월 토론토에서 서남쪽으로 2시간 거리의 온타리오주 런던에 정착했다.

런던에서만 50여년을 살며 편의점과 세탁소 사업으로 삼남매를 교육 시켰고, 은퇴한 뒤 부동산 등으로 노후대책을 세운 그는 아내와의 약속에 따라 4년 전 온타리오주 런던의 빅토리아(Victoria) 병원과 웨스턴(Western) 음대 그리고 키와니스(Kiwanis) 재단 등에 거액의 기부금을 출연했다.
 
▲ 고액기부자 명단에 이름올린 한인 캐나다동포 박옥규씨가 아내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기부자 대리석판 앞에 서 있다. 이 수목원(Arboretum)은 런던 시내에 위치한 스프링뱅크 공원 안에 있다.
ⓒ 조욱래
 
비영리사회단체 키와니스 재단은 아내의 이름을 딴 '박영자 추모 피아노경연 우수상(The Young-Ja Park Memorial Piano Competition Award)'을 신설, 작년부터 음악 경연대회 입상자들에게 2250달러의 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1등은 1천 달러, 2·3등에 각각 750달러 500달러를 수여하는 이 장학금은 박씨 부부의 기부금을 토대로 매년 조성된다.

웨스턴 음대 역시 2019년 '박영자 실내음악 우수상(Young-Ja Park Chamber Music Award)'을 제정, 피아노 4중주 부문에 입상한 학생들에게 장학금 3천 달러를 매년 지원한다.

유명 공연이 자주 열리는 웨스턴 음대 본쿠스터 홀(von Kuster Hall) 3층에는 박씨 아내의 이름이 새겨진 '박영자 컨퍼런스 룸(Young-Ja Park Conference Room)'이 있다.

런던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스프링뱅크 공원(Springbank Park) 수목원에도 박씨 부부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이는 런던 시청에 일정 금액을 기부하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한데 지금까지 석판에 이름을 남긴 한인은 박씨 부부가 유일하다. 한인 이름으로 제정된 상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런던에서 한인이민 50년 역사상 처음이며 캐나다 전체에서도 매우 드물다.

박씨는 기부금을 토대로 해마다 진행되는 이같은 나눔 실천이 아내 때문에 가능했다며, 2018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고인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사실 박씨는 병상에 있는 아내의 기부의사를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랐지만 지금은 자신을 일깨워준 아내가 너무 고맙다. 박씨가 제정된 상마다 아내 이름을 넣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박씨는 자녀교육을 위해 평생 모든 것을 헌신했던 아내가 정작 아이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 몹시 슬프다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70세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난 아내를 생각하면 꽃을 지극 정성으로 가꿨으나 정작 꽃이 피는 감격의 순간을 못 본 독일 가곡 '비운의 정원사'가 떠오른다. 아내는 우리 가정의 빛이자 등대이며 만능엔터테이너였다. 법무사에서부터 계리사·영양사·가정교사·인생상담가·행복전도사 등 가정에서 필요한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담당했다. 그런 정신적 기둥이 2018년 7월 폐암말기 진단을 받고는 한 달 만에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 가족들의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4년이란 시간이 지났어도 그는 아내를 떠올릴 때마다 북받치는 감정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민 1세대인 박 여사는 힘든 언어장벽을 극복, 간호사(RN·Registered Nurse)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 10여 년 넘게 병원에서 근무했지만, 둘째 딸과 막내아들이 연년생으로 태어나자 미련없이 간호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할 정도로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바쳤다."

이민 와서 편의점·세탁소하며 자식교육 정성 쏟아
 
 박옥규씨의 가족사진. 암투병 중이던 박옥규(윗줄 가운데)씨가 2005년 찍은 가족 사진. 아래 오른쪽이 아내 박영자씨다. 맨 오른쪽은 첫째 딸 수영씨, 아래 왼쪽이 둘째 딸 수정씨, 윗줄 왼쪽은 막내 아들 종원씨.
ⓒ 조욱래
 
이들 부부의 헌신으로, 큰 딸 수영(영어명 에니타 Anita)씨는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피아노 석사와 스페인 문학 박사학위를, 둘째 딸 수정(영어명 안젤라 Angela)씨는 토론토대 피아노 석사를 거쳐 몬트리올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메이드인 캐나다(Made in Canada) 피아노 4중단을 결성, 2021년 6월 4일 캐나다 최고 권위의 주노(Juno)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3년 전부턴 런던 웨스턴대에서 부교수로 임명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응급의학 전문의(Emergency Medicine Physician)인 셋째 종원(영어명 앤드류 Andrew)씨는 지난해 1월 치열한 선거전 끝에 온주의사협회(Ontario Medical Association·OMA) 회장으로 당선됐다. 4만 3천 명의 의사들이 가입된 온주의사협회는 캐나다 최대 의료단체이며 정치, 경제, 사회 등 주류 사회에 미치는 비중과 영향력이 막강하다. 

부부가 그토록 자녀교육에 열정을 바친 이유는, 자신들의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못 배운 한을 자녀에게 절대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다짐 때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두 딸의 피아노 경연대회에 참가했을 때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대회 개최 며칠 전부터 인근 호텔에 머물며 자녀의 컨디션을 최고로 올렸지만, 우리는 가게 영업 때문에 온 식구가 대회 직전 출발, 밤새 운전해 당일 도착한 적이 많았다. 8~9시간 걸려 퀘벡·몬트리올에 도착하거나, 캐나다 동쪽 끝 핼리팩스(Halifax)까지 1박2일 동안 운전한 적도 있다. 대회날 아침식사도 맥도널드 햄버거가 전부였지만 두 딸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여러 번 우승해 우리에게 기쁨을 안겼다. 좁은 차 안에서 가족이 서로 부대끼며 함께 울고 웃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자녀 교육에 욕심이 없을 부모가 어디 있겠냐마는 박씨 부부는 자녀들이 공부를 원할 때면 두말없이 지원했다. 학비가 높기로 유명한 미국서 큰 딸이 10년 간 음악 석사와 서문학 석·박사 학위를 공부할 때도 이들 부모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보태겠다는 딸의 고집을 꺾으며 공부에만 집중토록 했다. 부모라서 가능한 것일까.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며 힘들게 번 돈이지만 세 남매의 미래를 위해 쓰는 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박씨는 부모의 뒷바라지를 저버리지 않고 각자의 영역에서 성공한 자녀들에게 오히려 고마움을 표했다. 한국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들 부부의 꿈이 캐나다 이민을 통해 자녀에게서 큰 결실을 맺은 것이다.
 
▲ 홀로남은 콘도에서  박옥규씨가 소파에 앉아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콘도는 유명한 공원이 바로 인접하고 있어 박씨 부부가 행복한 노후생활을 위해 분양 받았지만, 입주 1년을 앞두고 아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현재 박씨만 혼자 살고 있다.
ⓒ 조욱래
마지막 버킷리스트는 인생 수기

박씨는 요즘 자신의 마지막 버킷리스트인 인생 수기 작성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젊은시절 종종 간단한 수필과 산문을 쓰며 문학에 심취하기도 했던 그가 다시금 글 쓰는 재미에 빠진 이유다.

"글쓰기에 집중하다보면 어느덧 하루 반나절이 금세 지나간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허약한 기억력에 의지하면서 지난 반세기의 삶을 되짚는 것이 마치 황량한 들판에서 가을 이삭을 줍는 것과 같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한편으론 기쁨과 보람도 함께 느낀다. 26세에 정든 부모형제와 고향을 떠나 83세가 되기까지 장장 57년 세월을 독일과 캐나다에 살면서 겪었던 지난 날을 회상할 때마다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앞을 가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수기를 문학을 전공한 큰 딸이 영어로 번역해 보관하고, 나중에 후손 중 누군가 가문의 뿌리를 깨우치는데 쓰임 받는다면 나는 저 세상에서 한없이 기뻐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83년 내 인생을 돌아보면 오직 가난의 슬픔과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살았다. 나는 캐나다에 산 50여 년 동안 주변의 수많은 유혹에도 자식교육에 집중하고자 골프·술·담배를 철저히 멀리했다. 이렇게 살 수 있었던 내면에는 이민 초기 읽었던 헤르만헤세의 소설 <크눌프>가 큰 영향을 미쳤다.

주인공은 오랜 방랑에 지친 몸을 이끌고 어느 겨울 날, 잃어버린 고향과 첫사랑을 그리며 눈 덮인 산을 넘어 물레방아조차 얼어붙은 고향을 찾는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이미 찾을 수 없다. 찬바람을 맞으며 마을 뒷산에 오른 그는 신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그대 후회할 게 더 있는가?' '아니요, 이젠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이 들고 삶에 지친 주인공의 절규가, 머나먼 외국 땅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내가 죽기 직전 토해내는 독백일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의 깨달음이 지금까지의 삶에 준엄한 교훈과 생활 지침이 됐다."

해외에서만 반세기 넘게 산 그는 자신의 인생수기에서 '원칙과 신뢰'를 특히 강조했다. 큰 위기가 닥칠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귀인이 등장해 어려움을 해결한 것이 매순간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솔직하고 거짓없이 살아온 마음가짐 때문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젊은 시절 무심코 도왔던 친구가 박씨의 독일 광부생활 중에 2년 넘게 '사상계'를 보내 지독한 외로움과 지적갈증을 해갈시킨 것이 그랬고, 캐나다 이민 길에 한국을 잠깐 들렀을 때, 박씨의 솔직한 모습을 눈여겨 본 선생님이 결혼을 극구 반대한 장모를 설득해 극적으로 허락을 받아낸 것도 그러했으며, 캐나다에서 은인같은 C 장로와 중국인 L 교수 또한 그렇게 만난 인연들이다. 

무엇보다 4년 전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한동안 식음을 전폐할 때, 손수 음식을 만들어 식사와 산책을 도운 천사같은 교회 신도들이 없었다면 그가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을까?  

"숨을 거두기 전 그동안 받은 은혜를 갚는 것이 내 도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허망하게 아내를 잃은 뒤 평소 생각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고 이 다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렬해졌다."
 
▲ "아내를 생각 할때마다 그리움에 미칠 것 같다" 박옥규씨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지 4년이 지났지만 그를 생각할 때마다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며 울먹였다.
ⓒ 조욱래
'박옥규 인생 수기'는 사무치게 그리운 아내에게 전하는 편지로 끝을 맺는다.

"여보, 내 인생에서 큰 축복은 당신과의 결혼이었고 가장 기뻤던 시간은 고된 일로 거칠어진 당신 팔과 다리를 마사지 할 때였소. 코코넛 오일의 부드러움에 젖어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당신 모습은 정말 천사 같았지. 이제는 당신 떠난 빈자리의 공허함을 가슴에  묻고, 삼남매와 어린 손주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남은 여생을 살고 싶소. 

헤르만헤세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마지막 때에 신이 나에게 '후회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주저함도 없이 '평생이 기적이었던 축복같은 삶,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바라는 것은 오직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 전부'라고 대답할 것이오. 

그렇게 살다 숨 거두면, 서럽게 보고 싶은 당신을 만나, 우리가 이룬 결실을 바라보며 즐거웠던 지난 날을 밤새워 회상하면서 회포를 풀고 싶소. 날 살리고 먼저 떠난 당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조금만 있어요. 나 곧 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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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캐나다한국일보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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