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비극 겪은 마고 여왕

이준목 2023. 1. 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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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그녀가 사랑했거나 소중하게 여겼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모조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징크스를 피하지 못했던 비운의 여성이 있다. 가족들에게 배신당하고 이용당하는 일이 일생 동안 반복됐고, 심지어 생애 단 한 번, 가장 행복하고 축하받아야할 결혼식은 전대미문의 학살극으로 얼룩진 피의 역사가 됐다. 왕실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 기구한 사연을 겪어야 했던 주인공은, 바로 훗날 '여왕 마고'로 알려지는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1553-1615)다.

1월 3일 방송된 tvN 역사교양예능 <벌거벗은 세계사> 80회에서는 '여왕 마고는 왜 피의 결혼식을 올렸을까'편을 통하여 프랑스의 흑역사로 꼽히는 종교전쟁의 시대를 둘러싼 뒷이야기를 조명했다. 유럽사 전문가인 임승휘 선문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아버지의 죽음

16세기 프랑스는 영국과의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끈 발루아 왕조가 집권하고 있었다. 마고는 1553년 국왕 앙리 2세의 막내 공주로 태어났다.

마고 인생의 첫 비극은 아버지 앙리 2세의 사고사였다. 마고가 6세였던 1559년 6월 30일, 앙리 2세의 장녀이자 마고의 언니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결혼 축하 잔치가 열렸다. 이벤트로 열린 토너먼트 마상창 시합에 직접 참가했던 앙리 2세는, 상대였던 스코틀랜드 근위군 대장 콩테 드 가브리엘 몽고메리의 창날이 부러져 투구 틈새로 파고드는 사고가 발생하며 어이없이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현대에서 널리 알려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1555년)이 현실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사례로도 회자되며 세간에 큰 충격을 줬다.

앙리 2세의 죽음은 이어지는 발루아 왕가의 비극에 서막에 불과했다. 앙리 2세의 뒤를 이은 아들 프랑수아 2세도 16개월 만에 심한 중이염으로 인한 감염으로 요절하면서, 10세에 불과한 동생 샤를 9세가 뒤를 이었다.

국왕들이 너무 어렸던 탓에 어머니이자 앙리 2세의 왕비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가 섭정에 나섰다. 이탈리아 출신의 카트린은 프랑스에서는 상인가문 출신의 외국인 왕비라는 이유로 멸시를 받았다. 카트린은 자신이 낳은 세 아들을 연이어 국왕으로 만들었고 세 번에 걸쳐 무려 30년을 섭정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그녀가 통치한 기간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샤를 9세가 왕위에 오른 1560년을 기점으로 세계사를 뒤흔든 대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종교개혁이다. 중세 이후 1000년간 유럽을 지배해왔던 로마 가톨릭의 비대해진 권력과 부패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마틴 루터과 장 칼뱅 등 개혁적인 성향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신교가 탄생하며 종교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일어났다.

프랑스 왕실은 앙리 2세 시절까지만 해도 신교도를 탄압하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신교도들의 세력은 꾸준히 증가했고, 카트린 왕비와 샤를 9세는 신교와 구교 사이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카트린 왕비는 1562년 생제르맹 칙령을 통하여 프랑스 최초로 신교의 존재를 왕실 칙령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프랑스 최대의 귀족가문이던 기즈 가문을 비롯한 가톨릭 강경파들은 같은해 바씨 대학살을 일으켜 신교도들을 학살하고 왕실을 압박한다. 이에 분노한 신교도들도 복수를 선언하며 30여 년간 이어지는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내전인 종교전쟁(위그노전쟁, 1562-1598)이 시작된다.

카트린 왕비와 샤를 9세는 양측의 대립을 중재하기 위하여 정략결혼을 제시한다. 가톨릭을 대표하던 왕실이 결혼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신교와 손을 잡으려했던 것. 그리고 이 결혼의 희생양이 된 것은 마고 공주였다.

마고의 혼인 상대는 신교도 진영의 핵심세력인 나바라 왕국의 왕자 앙리 드 나바라(훗날 앙리 4세)였다. 가톨릭을 상징하는 공주와 신교를 상징하는 왕자의 만남은 양측 진영에 모두 충격과 반발을 불러왔다.

결혼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양측은 마고의 개종을 요구하는 신교 측의 제안을 카트린이 거절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또한 결혼을 두 달 앞두고 마고의 시어머니인 잔 달브레 왕비가 파리 방문 중에 돌연 급사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많은 이들은 카트린이 잔 달브레를 독살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앙리 4세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한 정치적 야심 때문에 마고 공주와의 혼인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앙리 4세는 신교의 대표 군사지도자인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호위를 받으며, 결혼식을 위하여 사실상 적진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로 입성했다. 당시 파리시민들은 신교가 파리를 점령하러 온 것이 아니냐며 경계하는 이들이 많았다.

1572년 8월 18일, 신구교가 대립하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앙리 4세와 마고의 결혼식이 진행된다. 마고는 성혼선언문에서 앙리 4세를 남편으로 맞이하겠냐는 질문에 침묵하는 돌발행동을 저질렀다. 사실 마고는 종교가 다른 남편과 강제로 결혼하는 것이 싫었을 뿐 아니라, 왕실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즈 가문의 귀족인 앙리 드 기즈와 이미 내연관계였다. 어머니 카트린과 오빠 샤를 9세는 마고를 강제로 복종시켜 끝내 혼인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이는 또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결혼식 이후 피로연이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콜리니 제독이 암살시도로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 암살 배후에는 콜리니에게 아버지를 잃었다고 믿고있던 앙리 드 기즈, 콜리니를 아버지처럼 따르던 샤를 9세를 보고 신교에 회유되어 권력을 상실할 것을 걱정한 카트린 왕비 등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혼란에 빠진 앙리 4세와 신교도들은 당장이라도 파리에서 전쟁을 일으킬수 있는 긴장된 분위기가 고조됐다.

카트린 왕비와 샤를 9세, 앙리 드 기즈는 암살 당일날, 은밀한 회동을 갖고 신교도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파악하여 차라리 선제공격을 할 것을 모의한다. 카트린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앙리 4세 곁에 있는 마고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임에도 계획이 누설될 것을 우려하여 마고를 남편 곁에 머물도록 한다. 딸을 희생하여 아들과 권력을 선택한 것이었다.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피의 결혼식'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앙리 드 기즈가 이끄는 가톨릭 군대는 파리 전역에서 신교도들에 대한 대학살을 단행한다. 루브르 궁전 일대를 비롯하여 파리 전역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기즈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하여 부상 당하여 누워있던 콜리니를 창밖으로 내던져 잔혹하게 살해했다.

여기에 신교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파리 시민들까지 가담하며 파리 일대에서 며칠에 걸쳐 시체가 쏟아지는 광기의 학살극이 이어졌다. 기록에는 너무 많은 시신들을 센강에 던져서 강이 피로 물들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보다못한 샤를 9세는 학살 중단을 명령했으나 이미 상황은 통제불능이 된 지 오래였고 전국에 걸쳐 1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잔인하게 살해됐다. 사가들은 이를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피의 결혼식'이라고 부른다.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그레고리 13세는 오히려 대학살을 축하하고 기념메달까지 만드는 종교인으로서의 자질이 의심되는 정신나간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역시 대학살을 지지했다. 종교라는 이름의 광기가 인간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섬뜩하고도 슬픈 실화다.

참혹한 비극의 중심에 놓인 마고는 카트린 왕비와 샤를 9세에게 남편인 앙리 4세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카트린은 살려주는 조건으로 앙리 4세의 가톨릭 개종을 요구했다. 앙리 4세는 살기 위하여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고와 신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프랑스 왕실의 운명도 평탄하지 못했다. 피의 대학살을 목격한 이후 정신적 충격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샤를 9세는 폐렴에 걸려 1574년 25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동생 앙리 3세가 뒤를 이었으나 역시 후사가 없는 상황이었다.

포로생활을 하던 앙리 4세와 마고 부부는 왕위계승후보로 급부상한 막내 왕자 알랑송과 손을 잡고 카트린 왕비와 앙리 3세를 견제했다. 카트린은 마고 세력의 측근이자 마고의 연인이라는 소문도 있었던 라몰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처형시켰다. 또한 마고의 사생활을 둘러싼 각종 근거가 불분명한 추문들이 곳곳에서 쏟아지며 마고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마고는 왕실의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알랑송과 앙리 4세를 탈출시킨다. 신교 진영으로 복귀한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복수를 위하여 가톨릭 세력에 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마고는 오빠인 앙리 3세와 남편인 앙리 4세로부터 모두 잇달아 버림받으며 오갈 데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졸지에 왕위 계승 1순위가 된 앙리 4세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설상가상 마고의 남동생 알랑송이 요절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국왕 앙리 3세는 후사가 없었고 여성인 마고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기에, 마고의 남편인 앙리 4세가 졸지에 강력한 왕위계승후보로 부상한다.

이로써 프랑스의 종교전쟁은 왕위를 둘러싸고 발루아 왕실(앙리 3세)-가톨릭 강경파(앙리 드 기즈)-신교(앙리 4세)가 경합하는 세 앙리들의 왕위쟁탈전으로 바뀌었다. 공교롭게도 세 사람은 각각 친오빠-전 애인-남편으로 모두 마고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공통점도 있었다.

마고의 선택은 연인이었던 기즈 공작이었다. 마고는 신교에 협력하던 태도를 바꿔 기즈와 손을 잡고 프랑스 남부에서 가톨릭 세력을 구축한다. 분노한 앙리 3세는 군대를 보내 마고를 생포하여 유폐하고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기즈와 앙리 3세는 손을 잡고 왕실과 신교가 맺었던 모든 평화조약들을 폐기한다. 앙리 4세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려서 프랑스 왕위계승 자격마저 박탈당하며 벼랑 끝에 몰린다. 하지만 앙리 4세가 이끄는 신교세력은 쿠트라 전투에서 가톨릭 군대를 대파하며 전황을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가톨릭 세력의 자멸을 부르는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다. 앙리 3세와 기즈는 잠시 손을 잡았지만 공존할 수 없는 관계였다. 강대한 권력과 가톨릭계 시민들의 지지까지 등에 업은 기즈는 앙리 3세를 파리에서 몰아내고 잠시 왕처럼 군림했다. 하지만 앙리 3세를 지나치게 얕보고 방심하다가 함정에 빠져서 어이없이 암살 당하고 만다. 카트린 왕비는 앙리 3세가 기즈를 죽인 사실을 전해 듣고 발루아 왕조의 어두운 미래를 예측하고 죽어가면서도 탄식했다고 한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한편 기즈를 죽이고 잠시 기고만장했던 앙리 3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톨릭 수도사에게 암살당했다. 카트린의 세 아들 모두 후사가 없었기에 이로써 발루아 왕가의 남성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이로서 졸지에 왕위계승 1순위가 된 앙리 4세는 무주공산이 된 파리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왕이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파리 시민들은 신교도인 앙리 4세의 왕위 등극을 거부하며 강력하게 저항했다. 앙리 4세는 무력으로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고 다시 한 번 가톨릭 개종이라는 대안을 선택한다. 반대할 명분이 사라진 파리 시민들은 그제야 앙리 4세를 받아들였고 1594년 드디어 발루아 왕가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니 바로 부르봉 왕조의 시작이다.

바록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위하여 여러 번 개종을 마다하지 않았던 앙리 4세였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기나긴 종교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1598년 '낭트 칙령'을 발표하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모든 차별을 폐지했다. 앙리 4세는 종전 이후 "우리는 모두 프랑스인이며 같은 조국의 동포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을 격분시키는 냉혹하고 잔인한 감정을 버리고 이성과 온정으로 화해해야 한다"는 어록을 남겼다.

마고는 앙리 4세와 이혼했지만 파리로 돌아와 발루아 왕조의 유일한 마지막 생존자로서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버팀목이 되어줬다. 신교도 출신이고 신왕조의 첫 국왕이라 왕권이 아직 불안정했던 앙리 4세에게 마고의 지지는 큰 힘이 됐다. 앙리 4세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황폐해진 프랑스를 복구하며 평화와 발전을 이룬 명군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앙리 4세도 다른 마고의 남자들처럼 끝내 불행한 결말을 피하지는 못했다. 1610년 앙리 4세는 한 가톨릭 광신도에게 암살 당한다. 마고가 사랑하고 의지했던 남자들은 모두 암살 당하거나 요절하는 비극적인 징크스를 맞이했다.

종교갈등으로 비롯된 광기는 왕실의 비극으로까지 이어졌고 한 여인의 삶까지 망가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마고는 사랑했던 남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61세로 가장 장수했다.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후사를 남기지 못 했던(불임이라는 소문이 있다) 그녀의 죽음을 많은 이들이 애도했다고 한다. 

프랑스를 대위기로 빠뜨린 종교전쟁의 본질은 사실상 권력을 둘러싼 내전이었다. 참혹한 고통을 겪은 프랑스에서는 이후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각심에서 '톨레랑스(관용)'라는 가치관이 발전하게 된다. 관용은 오늘날 프랑스를 자유의 나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평화는 무력으로 유지될 수 없다. 오직 이해를 통하여 유지될 수 있다'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어록은, 우리가 비극의 역사를 통하여 깨달아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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