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만원에도 줄섰다…아르헨 원정출산 짐싸는 러 여성들 왜
“전쟁 이후 대안을 찾아야 했어요. 아르헨티나 여권은 내 아기에게 자유를 줄 겁니다.”(아르헨티나에서 원정출산한 러시아 여성)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러시아 여성들 사이에서 아르헨티나 원정출산 붐이 일고 있다고 가디언이 3일(현지시간) 전했다.
모스크바에서 아르헨티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비행 거리는 1만3475㎞로, 한국 인천에서 미국 뉴욕까지 거리(1만1511㎞)보다 멀다. 직항 노선도 없어 러시아 임산부들은 1회 이상 경유해, 최소 30여 시간이 걸려 원정출산에 나서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개전 후에도 러시아인의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고 있는 나라다.
주(駐) 아르헨티나 러시아 대사관에 따르면, 지난해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러시아인은 2000∼2500명 중 대다수가 출산 준비 중인 여성이었다. 대사관 관계자는 올해는 원정출산 목적의 러시아인 방문객이 1만 명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봤다.
수천만 원 비용에도 아르헨 원정출산
지난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기를 낳은 모스크바 출신의 폴리나 체레보비츠카야는 “이곳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을 때, 내 앞에 줄을 선 러시아 여성이 적어도 8명은 있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원정출산을 지원하는 업체 운영자 키릴 마코베예프는 “올해 5월까지 예약이 다 찼고, 대기자 명단도 있다”면서 “매일 12명 이상의 러시아 임산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다”고 했다. 이어 “전쟁 이후 원정출산이 급증하면서 아르헨티나 병원에선 러시아어 광고까지 내걸었다”고 덧붙였다.
소셜미디어(SNS) 텔레그램에 개설된 아르헨티나 원정출산 관련 단체 대화방엔 러시아인이 3000여 명 이상 가입했다. 이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의술이 뛰어난 산부인과 등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대다수 러시아 임산부들은 의료시설이 잘 갖춰진 부에노스아이레스 병원을 선호한다.
원정출산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비행기 편도 비용만 수백만 원이고, 통역과 서류 작업 등을 지원하는 업체 수수료는 최대 8000파운드(약 1200만원)이다. 의료서비스가 좋은 개인병원의 경우 출산 비용으로 최대 4000달러(약 500만원)가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숙박·식사비 등이 더해지면 원정출산 경비가 수천만 원은 쉽게 넘는다.
아르헨 여권 특혜 많아, 징집도 회피
러시아 임산부들이 값비싼 비용을 치르며 원정출산에 나선 이유는 태어날 아이에게 아르헨티나 국적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개전 이후 서방의 엄격한 제재로 러시아인들은 미국·유럽으로 진출 장벽이 높아졌다. 러시아인들은 군 동원령으로 언제 전장에 끌려갈지 모르는데다 서방으로 탈출마저 어려워지면서, 자녀에겐 다른 나라 국적의 여권을 쥐어주자는 공감대가 퍼졌다.
아르헨티나는 출생지주의에 따라, 자국 영토에서 출생하면 국적을 부여한다. 러시아와 달리 아르헨티나 여권을 소지하면 유럽연합(EU) 국가, 영국을 포함해 171개국을 무비자로 갈 수 있다. 미국 장기 비자를 받기도 어렵진 않다. 아이가 아르헨티나 국적을 받으면, 부모도 2년 이내에 아르헨티나 국적을 얻을 수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원정출산 후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아르헨티나에 눌러앉는 러시아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2005년부터 거주한 막심 미로노프는 “지난해 3월부터 거리에서 러시아어가 자주 들린다”며 “아르헨티나가 서방 제재에 전부 동참하지 않고 무비자를 계속 시행하면서 IT 분야 개발자 등 러시아 내 고급 인력이 유입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10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산한 러시아 여성 빅토리야 오브빈체바는 “군 동원령과 경제 제재로 러시아에서 사는 것이 힘들어졌다”면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인 남편은 이곳에서 아르헨티나 시민권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했다.
러시아 출신 아르헨티나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17만~35만명으로 추정된다. 19세기 말 유대계 러시아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했고, 1991년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인들이 많이 넘어왔다.
한편 지난해 2월 말 개전 이후 약 100만 명의 러시아인이 자국에서 빠져나갔다. 러시아 전체 인구(약 1억4600만명) 중 1% 미만이다. 개전 초기에는 언론인·IT 개발자 등이, 지난해 여름에는 사업가 등 중산층 세력이 유럽, 남미 등으로 떠났다. 지난해 9월 부분적 군 동원령이 발동한 후에는 청년들이 인접국인 조지아·카자흐스탄·몽골 등으로 탈출했다.
박소영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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