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명 묻힌 대전의 비극 위에 SF를 덧칠했더니
[김성호 기자]
학살의 시대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한반도 곳곳에선 저항하지 않는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살육이 이어졌다. 널리 알려져 있진 않으나 대전 역시 그중 하나였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는 재소자와 보도연맹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던 이들 각기 수천 명(대전형무소 산내학살진상규명위원회 추산 최소 3000여 명)이 군경에 의해 산내에서 옥천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낭월동 곤룡골에서 살육됐다.
개중에선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사태에 관련된 정치범은 물론, 인근 민간인까지도 포함돼 있었다. 미군정이 위조지폐 사건을 조작해 구속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는 조선공산당 간부출신 독립운동가 이관술 등도 여기 포함돼 있었다. 그의 유족이 대법원으로부터 1억 5000만 원의 국가배상판결을 받아들기까진 무려 65년이 걸렸다. 그러나 곤룡골에서 숨진 수천의 이들 가운데 이관술과 같은 억울한 이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 종말의 소년 책 표지 |
ⓒ 모두의책 |
여기 <종말의 소년>이란 작품이 있다.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의 온갖 질서가 붕괴된 절망적인 세상 가운데 온몸으로 제 살 길을 헤쳐 나가는 사내의 이야기다. 깨어난 사람들은 나이가 뒤바뀌어 아이가 부모보다 늙고 부모는 아이처럼 어려지기도 한다. 거대한 새가 사람을 사냥하여 인간들은 깊은 지하 밑으로 숨어 간신히 연명한다. 먼지로 뒤덮인 세상은 수십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 마스크 없인 숨조차 쉬기 어려우니 인간들은 이것이 종말인지를 의심한다.
종말을 연상케 하는 절망적인 세계 가운데 새잡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거대한 괴조를 어떻게든 사냥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중에는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수민이 있다. 누나와 함께 살아가는 수민은 나이로 치면 중년이 되었음이 분명하지만 세상이 뒤바뀌는 동안 아이처럼 어려져 세월이 흘렀음에도 청소년처럼 보인다. 절망의 세상 가운데 그를 돌본 건 누나로, 여자 혼자의 몸으로 아이로 돌아간 동생을 지켰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동안 정신마저 온전치 못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수민이 새잡이를 하며 누나를 돌보게 된 것이다.
소설은 새잡이 수민에게 들어온 모종의 의뢰와 그로부터 벌어지는 모험을 다룬다. 인간을 잡아먹는 새와 그 새를 잡아 죽이는 새잡이들의 싸움이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야기는 질서가 붕괴된 세상에서 인간 군상들이 보이는 온갖 행태로부터 세계가 붕괴된 이유를 좇아나가는 이들의 모습으로 옮겨간다.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며 착취하고 군림하려는 가운데 많은 이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고 상하고 마침내는 죽어나간다.
대전 근현대를 배경으로 판타지를 쓰다
얼핏 흔한 종말 위에 쓰인 판타지처럼 보이는 이 소설엔 나름의 특별함이 있다. 소설 가운데 대전이라는 도시의 지난 역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벌어진 학살사건은 그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학살당한 이들의 원령이 직접적으로 소설 가운데 등장할 뿐 아니라, 약한 자들을 착취하는 군 관계자들의 모습으로부터 지난 역사 속 독재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밖에도 대전을 대표하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참전 대가로 미국이 지원한 자금과 기술이양으로부터 얻어졌다는 사실 등이 언급되기도 한다.
소설의 또 다른 재미는 대전 시내 곳곳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대전을 지나는 천들과 지하도가 주요하게 등장하고 대덕과 유성, 중구 등 대전의 성장을 보여주는 여러 행정구역의 차이 역시 유의미하게 언급된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 더는 오늘의 세상이 아닌 대전에서 사람들이 빚어내는 천태만상이란 참혹하면서도 아름답고 괴로우면서도 멋지다.
흩어지는 후반부에도 의미 깊은 이야기
<종말의 소년>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흡입력이다. 특히 읽는 이를 폐허가 된 세상으로 데려가는 전반부의 솜씨가 제법 인상적이다. 흥미롭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독자의 관심을 잡아둘 만하며, 사건이 전개되는 동안 스리슬쩍 중첩되는 역사 이야기 또한 색다르다.
아쉬운 건 소설이 후반으로 갈수록 밀도가 떨어지고, 결말에 있어서도 독자를 휘어잡지 못한다는 점이다.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질뿐더러 독자의 감정을 움직일 만큼 응축되고 완성도 높은 서사를 갖지 못했단 점도 안타깝다. 무엇보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타가 퇴고며 편집이 허술했음을 알게 한다.
이 같은 단점에도 대전이란 지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보기 드문 판타지란 점에서 <종말의 소년>은 주목해 봄직한 작품이다.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와 통할 수 있는 창의적인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이라면 최참치의 이 소설을 집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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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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