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쇼트 시네마⑳] '각자의 입장' 속에 가려진 합리화와 자기혐오

류지윤 2023. 1. 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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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인 감독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 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편집자주>


회사원 란희(김해나 분)는 친구 선준(박성준 분)과 통화를 하며 약속 장소로 향한다. 선준의 여자친구는 그가 3년 전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알고 란희에게 찾아와 진상 짓을 했다. 바람피운 상대는 자신이 아님에도, 이 상황을 받아내야 했던 란희는 선준에게 화가 나있다. 게다가 약속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한다. 짜증이 난 란희는 길을 걷다 타인과 어깨가 부딪치자 미간이 더 찌푸려진다.


선준과 만나기로 한 술집에 앉아있는데, 싱싱(심은우 분)을 만난다. 란희는 한 때 독립영화 감독을 꿈꿨으나, 개인 사정으로 인해 영화를 엎고 잠수를 탔던 전적이 있다. 싱싱은 그 때 엎은 영화의 여주인공이었다. 싱싱은 함께 작업했던 기혜덕(권오성 분) 감독과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뒤풀이를 하러 왔다며 자연스럽게 란희의 테이블에 앉는다. 그리고 란희를 회사원이 아닌 영화 감독이라고 소개한다.


우연한 만남은 불편한 만남이 됐다. 서로 찜찜하고 아쉬운 감정은 숨긴 채 란희와 싱싱은 안부를 물으며 겉도는 대화를 나눈다. 싱싱은 란희가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잠수 타버린 일이 여전히 섭섭하다. 란희는 자신의 개인 사정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 기 감독은 "영화는 사람이 좋아야 한다", "영화는 언제 나오느냐"라는 말들로 란희의 신경을 살살 긁는다. 기 감독은 예술가라는 자신의 직업에 심취돼 란희와 싱싱에게 눈치 없는 말들을 계속해서 건넨다. 란희가 예민해졌을 때 선준이 나타났다.


로맨스 작가인 선준이 나타나자 싱싱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계속해서 일부러 영화 이야기를 하는 기 감독의 행동을 란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기 감독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고 따져 묻는다. 기 감독은 사실 싱싱과 란희 사이의 일을 알고 있으며 싱싱의 현재 남자친구다.


기 감독과 란희의 설전은 이제 란희와 싱싱에게 옮겨갔다. 싱싱은 란희가 왜 잠수를 탔는지 알고 있었다. 불륜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선준 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꽁꽁 숨겨두고 싶었다. 그리고 란희는 깨닫는다. 3년 전 선준이 바람피운 상대가 싱싱이이었다. 두 사람이 5시간을 지각하는 바람에 란희의 촬영에도 영향을 준 적이 있다. 란희는 폭발하며 선준이 로맨스 작가가 아니라 19금 웹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폭로한다. 기 감독은 선준이 싱싱의 전 남자친구란 사실에 쿨한 척 하지마 이내 지질한 본성을 드러낸다.


이 테이블의 대화는 이미 엉망진창이 됐다.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를 폄하하고 평가하는 말들로 가슴들을 쑤신다.


영화는 대화를 통해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 자격지심 등을 하나씩 벗겨낸다. 란희는 영화 감독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불륜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자기 혐오와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대신 회사원이 돼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싱싱은 작품을 할 때마다 남자들과 연애를 한다. 병원 이사장 딸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작품을 할 땐 늘 선택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늘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기 감독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재능이 있지만, 당장 이번 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한다. 선준은 19금 웹소설을 필명으로 연재 중이지만, 어머니가 모텔 여섯 개를 운영하고 있어 경제적으로는 자유롭다. 두 사람에게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가혹하다.


네 사람이 서로를 비난하는 말들은 사실 자기 혐오에서 비롯됐다. 자존감을 위해 합리화를 하고 상대를 평가했지만, 자신의 결핍들을 숨기고 싶은 본능에서 발화됐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날카로운 말들을 뱉어내지만, 정작 상처 입는 건 본인들이다. 각자 입장만 열심히 떠들 뿐, 서로의 입장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렇게 술자리에서 오갔던 말들은 "월급 또박또박 나오는 회사원인 내가 사겠다"라는 란희의 마지막 말로 정리된다.


오프닝 장면에서 누군가 어깨를 치자 잔뜩 얼굴을 찡그린 란희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란희가 전화 통화를 하다 주변을 살피지 못한 탓에 자신의 어깨를 치고 간 사람일 뿐이다. 러닝타임 1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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