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스마트폰 줘도 미등록...더 치열해진 학벌 경쟁 [아이들은 나의 스승]

서부원 2023. 1. 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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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나의 스승] 대학 입시에 휘둘려 우스꽝스러워진 고교 교육

[서부원 기자]

이태 전 대학생이 된 제자 세 명과 반가운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 군입대를 앞두고 인사차 찾아온 거였다. 그때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것 하나만은 머릿속에 또렷하다. 그들 앞에서 대놓고 혀를 끌끌 찼을 정도로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너희들 우리나라 이름인 대한민국을 한자로 쓸 줄 아니?"
"두 글자는 쓸 줄 알아요. '대(大)'자와 '민(民)'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세 명 모두 대답이 같았다. 나라 이름 '한(韓)'자는 말할 것도 없고, 나라 '국(國)'자조차 획수가 복잡해 헷갈린다고 했다. 멋쩍어서인지 그러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내놓는 변명 아닌 변명이 있다. 어차피 스마트폰 사전 앱 하나면 다 해결된다는 것.

엊그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재작년에 졸업한 대학생 제자 두 명을 만나 얼마 전 끝난 카타르 월드컵 이야기를 나누다가 뜬금없이 영어 작문이 도마 위에 올랐다.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기적적으로 16강에 올랐고,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손흥민 선수의 인터뷰가 장안의 화제가 됐다.

"온 국민을 뭉클하게 만든 이 한 마디의 힘이 과연 이방인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만약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였다면,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을 그는 영어로 어떻게 표현했을까?"
"선다형 수능에 최적화된 저희 세대는 독해는 강해도 영작은 젬병이에요."

이 또한 둘의 대답이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았다. 명색이 대학생인데, 이 단순한 문장 하나 영작하지 못한다는 게 당황스럽다 못해 황당했다. 영어책을 손에서 놓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나이 쉰을 훌쩍 넘긴 나조차 단박에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데, 하물며 지금도 영어 공부에 목매달고 있을 그들임에랴.

공부에 목매단 3명과 포기한 7명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17일 한 시험장에서 수험생들이 전광판의 문자 응원을 받으며 고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요즘 고등학생들 흔히 단군 이래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똑똑한 세대라고 말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느끼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다들 밤잠 줄여가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긴 한데, 솔직히 똑똑한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가 있다. 매일 학교와 학원, 스터디 카페를 순례하고, 주말과 방학 때 오히려 더 바쁜 삶을 사는 아이들이 예나 지금이나 많다. 하지만, 시나브로 홍해 바다 갈라지듯 3:7 비율로 확연하게 나뉘는 느낌이다.

교사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교과와 학년에 상관없이 수업 태도와 성적 분포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느 교실이든 공부에 목매단 3명과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한 7명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상위 30% 아이들끼리의 경쟁은 살인적으로 치열해지는 반면, 하위 70%는 '태평성대'를 떠올릴 만큼 무기력한 모습이다.

내신 등급으로 치면, 상위 40%까지 아우르는 4등급이 기준선이다. 상위 23%가 경계인 3등급 안에 들어가기 위해 이를 앙다물고 공부하는 아이들과 몇 번 시도하다가 지레 포기하는 아이들이 혼재하는 구간이 4등급이다. 5등급 이하는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않는' 이들이라고 뭉뚱그려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3:7로 굳어지는 현실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지표가 하나 있다. 하위권인 7~8등급 아이가 5~6등급으로 올라서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간고사 때 8등급이었던 아이가 기말고사 때 무려 세 등급 간을 뛰어넘어 5등급을 찍은 사례가 종종 있는데, 노력한 결과임엔 틀림없지만 놀랍진 않다.

하위 70% 안에서는 벼락치기가 통한다는 걸 아이들도 인정한다. 학교 내 시험과는 달리 평상시 실력으로 치르게 되는 모의평가조차 한두 주 반짝 공부하면 5~6등급까지는 잡아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5등급 이하의 성적은 대학에서도 등급 차에 대해 '관대하게' 평가한다. 한마디로 '도토리 키 재기'라는 뜻이다.

반면, 상위 30%는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3~4등급에서 상위 11%의 2등급 안에 진입하려면, '4당 5락'을 능가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4당 5락'이란 4시간을 자면 합격하고 5시간을 잤다간 낙방한다는 뜻으로, 과거 본고사 시절 수험생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하물며 3~4등급에서 상위 4%인 1등급을 찍는 건, 하늘의 별 따기에 비유될 만큼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조금만 더, 더'를 외치며 그들을 독려하지만, 그것이 '희망 고문'일 뿐이며, 나아가 요행수를 바라는 짓이라는 건 교사들이 더 잘 안다. 그들은 학벌 경쟁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이상 내려오는 건 이미 불가능한 상황이 돼버렸다.

'당근'까지 제시하는 대학들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17일 오전 한 수험생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 이희훈
 
3:7로 갈리며 교실에서 '중산층'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지만, 놀랍게도, 대학 진학률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을 보인다. 해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은 70% 안팎이다. 지난 2010년 75.4%로 정점을 찍은 후 70%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최상위권에 드는 수치다.

이는 공부를 접어도 대학엔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대학 대신 취업을 선택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지금 대학에 못 가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다. 대학 진학에 내신 성적과 수능 점수 따위는 필요 없고, 오로지 등록금만 있으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아이들 입에서조차 나오는 지경이다.

내신 경쟁의 실질적 마지노선이 4등급에서 그어진다면, 대학 입시의 전선은 수도권과 지방을 가르는 행정구역의 경계선과 일치한다. 공교롭게도, '인-서울' 대학과 서울에 인접한 사립대학, 그리고 지방 거점 국립대학의 정원을 합하면 얼추 30%다. 숨 막히는 학벌 경쟁도 그 안에서만 벌어질 뿐, 나머지는 사실상 '무풍지대'다.

더는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 문이 닫힐 위기다. 오죽하면, 연구와 강의에 매진해야 할 대학 교수들이 신입생을 한 명이라도 더 '모시기' 위해 지역의 고등학교 교무실을 순례하며 '영업 사원'을 자임하겠는가. 등록하면 최신형 스마트폰과 태블릿 피시를 제공한다거나, 첫 학기 등록금을 면제해주겠다는 '당근'을 제시하는 대학이 드물지 않다.

몇몇 짓궂은 아이들은 정원 미달이 속출하는 지방 사립대학에 진학하는 친구들을 향해 '스마트폰 교체하러 가느냐'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어차피 지원만 하면 합격시켜주는 곳인데, 공부에 목매달 필요가 있느냐며 낄낄대는 모습을 보노라면, 교사로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이들이 학벌로 인정하는 범위는 'SKY'에서 시작해 지방 거점 국립대학까지다.

대한민국을 한자로 못 적고,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을 영작하지 못하는 대학생이 부지기수일 거다. 한낱 한자와 영어 실력만으로 대학생의 자질을 저울질한다는 건 섣부른 일일 테지만, 대학 입시에 휘둘리는 고등학교 교육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지고 있는지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부에 대한 아무런 열정도 없이 가는 대학이 과연 대학일 수 있을까 싶어서다.

이 글을 송고하려니, 지방대학의 수시 합격자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등록하지 않았다는 뉴스가 떴다. 전남과 전북, 경남과 경북 소재 대학의 경우엔 미등록률이 30%에 육박한다고 하니 대학 입장에선 비상이 걸렸을 듯하다. 당장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대학에서 대학생의 실력과 자질 운운하는 내 이야기가 한가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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