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그렇게 어른이 된다

2023. 1. 4.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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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연도가 들어간 노래여서 그렇겠지만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와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듣다 보면 1992년과 1994년의 그날이 자연히 떠오른다.

대학에 막 입학해 한껏 들떴던 그때와 첫사랑의 열병에 몸살 앓던 날들.

그때만 해도 2020년이라는 연도를 들으면 멀고 먼 미래의 일이라는 느낌이었다.

1992년의 장마를 지나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추억하고 2020년의 새시대를 톺았듯 저마다의 시간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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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달호 작가·편의점주


제목에 연도가 들어간 노래여서 그렇겠지만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와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듣다 보면 1992년과 1994년의 그날이 자연히 떠오른다. 대학에 막 입학해 한껏 들떴던 그때와 첫사랑의 열병에 몸살 앓던 날들.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는 가사를 들으며 처연히 슬펐던 감정이 어제처럼 그려지고, “하지만 그대여 다른 건 다 잊어도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대를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는지”라는 가사를 오늘 듣다 보면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지 하면서 홀로 미소 짓게 된다. 시간의 긴 강을 건너 지금 이 자리에 있다.

대학 시절 우리 학교엔 ‘새시대2020’이라는 동아리가 있었다. 환경, 평화, 정치개혁 등을 주제로 세상만사를 다 다루겠다는 듯 만기친람하는 동아리였는데, 적어도 2020년 즈음엔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 동아리가 생겼던 해가 1997년쯤. 그때만 해도 2020년이라는 연도를 들으면 멀고 먼 미래의 일이라는 느낌이었다. ‘과연 그날이 오겠어?’라는 아뜩한 의문마저 있었다. 2020년은 진즉 지나 2023년을 맞는다. ‘새시대’는 참 왔는지 모르겠고.

‘나이 서른에 우린’이라는 노래도 있었다. 백창우 시인이 작사 작곡한 이 노래가 나온 해가 1986년. 내가 처음 들었던 때는 열여섯 무렵이었다. 그때만 해도 ‘서른’이라는 나이 또한 까마득한 촉감이었다. 서른이 되면 나는 어른이 돼 있을 것이고, 결혼해 아이도 한둘은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그런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옆구리가 간지러웠다. 서른은 벌써 지났고, 마흔도 훌쩍 넘겼고, 갓 쉰을 앞둔다. 서른? 첫사랑에 성공했으면 그만한 아들딸이 있겠다.

세월의 언덕을 넘어 오늘의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때는 참 멀고도 먼 미래의 일들이라 여겼던 순간을 벌써 겪었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돌아보면 군대에서 보낸 26개월이, 그때는 시간이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 거냐고 푸념했는데, 지금은 삼사 년쯤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는 느낌이다. 요즘 18개월 군 복무 정도는 웃으면서 갔다 오겠다는 꼰대스러운 생각마저 고개를 드는데, 20대가 받아들이는 시간의 질감과 50대가 받아들이는 광음의 속도는 사뭇 큰 차이가 있는가 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세월의 사잇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걸음새는 저마다 다르다.

새해 첫날, 어머니 계시는 고향 집에 들렀다. ‘우리 엄마는 결코 늙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그 엄마는 벌써 칠순의 연세를 넘겼다. 허리가 구부정해졌고, 침대 머리맡에 손주들 사진을 일렬로 쭉 세워놓고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얘는 효민이, 얘는 민찬이, 얘는 승민이….” 그렇게 나름 치매 예방 훈련을 하신다나. 가냘픈 어깨를 주무르며 “아이고 엄니, 그런 말씀 마소. 구구단 거꾸로 외우는 기억력으로 120살까지는 사실 거요”라고 말했더니 “아이고 이놈아, 실없는 소리 마라. 가야 할 때 조용히 가는 것도 하늘에 대한 도리여” 하시며 벽에 걸린 십자가를 올려다보신다.

시간이 공평하듯 죽음도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내가 죽어도 세상은 세상대로 흘러갈 것이란 사실이다. 1992년의 장마를 지나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추억하고 2020년의 새시대를 톺았듯 저마다의 시간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올 한 해도 무탈하게 견디길 소원하며, 내가 세상에 남겨야 할 것들을 하나둘 돌아본다. 좋든 싫든 살아야 하는 것이 시간이고 세상이면, 이왕 사는 것 멋지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새삼스러운 다짐까지 해본다. 이렇게 훌쩍 어른이 됐다.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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