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가족이 뭐길래
혈연·혼인 중심 '정상가족론' 여전
국민 법감정과 현실변화 못 좇아
지난 연말 공분을 자아낸 얘기다. 54년간 자식과 연을 끊고 살던 생모가 2억원이 넘는 아들의 사망보험금을 수령하려고 나타났다. 생모는 남편이 죽자 열 살도 안 된 3남매를 남기고 재혼해 집을 떠났었다. 버려진 아이들은 친척 집을 전전했다. 그때 세 살이던 막내가 사고로 숨진 선원 A씨다. A씨의 누나 등은 반발했지만 지난달 부산지법은 생모의 손을 들어줬다.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모의 재산 상속권을 제한하는 ‘구하라법’(민법 개정안)이 수년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해서다. A씨 누나는 “우리에겐 엄마가 없다. 보상금은 동생을 길러준 할머니와 고모, (6년간) 사실혼 관계인 올케가 받아야 한다. 분하고 억울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실제 천안함 사건과 세월호 참사 때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2019년 가수 구하라씨 사망 때도 20년간 소식이 끊겼던 친모가 나타나 법정 공방 끝에 유산의 40%를 챙겼다. 당시 구씨 오빠의 입법 청원으로 발의된 구하라법은 20대, 21대 국회를 모두 통과하지 못했다. 우선순위에 밀렸고, ‘양육 의무를 게을리했다’는 게 상대적 개념이라 판단이 쉽지 않다는 등의 논란도 있다.
그러나 ‘공무원 구하라법’이라 불리는 공무원 재해보상법·공무원연금법이 국회를 통과해 시행 중이라 형평성 문제가 있다. 공무원에 대해 양육 책임을 다하지 않은 유족에게는 급여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급하지 않을 수 있게 한 법이다. 지난해 첫 적용 사례가 나왔다. 32년 만에 나타나 유족 연금을 받아간, 순직 소방관의 친모가 대상이었다.
조금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방송인 박수홍씨 친형 부부 횡령사건은 어떤가. ‘남보다 못한 가족’ 혹은 ‘혈육의 배신’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일 것이다. 박씨의 매니지먼트 일을 봐준 친형 부부가 수년간 61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됐다. 박씨는 평소 가족애가 남다른 효자 연예인으로 유명했고, 방송에 나와 가족의 반대로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지 못했다며 눈물짓기도 했다. 개인보다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았고 ‘피를 나눈 가족’이니 내 돈 네 돈 따지지 않은 것이 비극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한편 지난해 여가부는 동거 및 사실혼 부부, 위탁가정도 법률상 가정으로 인정받게 하겠다던 기존 입장을 번복해 큰 논란을 낳았다.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가족만을 인정하는 건강가정기본법은 ‘비혼 출산(한부모)·동거·1인 가구’ 등 새롭고 다양한 가족 형태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여가부 역시 시대에 맞지 않는 현행 ‘가족’ 정의 규정을 삭제하는 등 법 개정에 찬성해 왔는데, 새 정부 출범 이후 이를 뒤집은 것이다. 여가부는 “개정안으로 인한 소모적 논쟁을 지양하고, 실질적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혈연 중심 정상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족관으로의 회귀란 비판이 잇따랐다.
혼인·혈연 중심 가족 규정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을 ‘없는 존재’로 만들고 돌봄·노동·주거·의료·복지·상속·장례 등 삶의 전 과정에서 편견과 차별을 겪게 한다. 저출생 해결을 요원하게 하는 요인으로도 꼽힌다. 실제 지난해 12월 미국 CNN은 한국이 최악의 저출생 국가인 이유의 하나로 “청교도적 접근”으로 “다양한 가정 형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지목한 바 있다. “한국에서 아기를 갖는 것은 젊은 이성 신혼부부에겐 기대되는 일이지만, 그 외의 가정은 자녀를 기를 자격이 없다. 미혼 여성에겐 체외수정(IVF)이 제공되지 않고, 동성결혼은 인정하지 않으며, 사실혼 관계의 부부는 입양할 수 없다.”
2020년 여가부 조사에서 국민의 70%가 "혼인이나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고 응답했다. 낳기만 하면 부모, 피를 나눠야 가족, 그래야만 정상이던 시대의 종말은 상식이다. 공정과 상식을 바라는 국민 법감정, 변화하는 세태를 법과 정책이 좇지 못하고 있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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