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배운 할머니의 손글씨 "꼭 당선되세요"... 이 정치인의 꿈
[장진숙 기자]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달랑 가방 두 개만 들고 귀농한 사람. 농사를 시작하고 농민회를 만들고 안남어머니학교를 세운 그의 30여 년 농촌 활동은 뿌린만큼 열매를 맺어왔다. 그리고 처음 출마한 2022 지방선거에서 1등으로 당선되며 충북 유일의 진보당 기초의원이 됐다. 충북 옥천군의 송윤섭 군의원이다.
▲ 지역 협동조합 건물 앞에서 송윤섭의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농촌공동체를 만들고싶은 것이 그의 꿈이다 |
ⓒ 이하나 |
"절대 농사짓지 말라"던 아버지 말씀, 그런데 농촌만 가면 신바람이
전북 정읍이 고향인 송윤섭 의원은 서울대 원예학과 83학번으로 입학했다. 농과대학을 골랐지만 '생명공학'의 붐을 쫓았을 뿐 농촌 일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모님께 꾸지람을 들었다고.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셨어요. 어릴 때부터 밥상머리에서 받은 교육이 '너희는 절대 농사짓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내 자식이 농사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까지 하셨죠. 너무 고돼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그는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때도 농민운동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선배들도 '노동현장에 더 관심을 가져보는 게 어떻겠냐'고 만류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을 뛰게 한 건 결국 농촌이었다.
"다른 활동도 많이 해봤지만 농촌을 가면 이상하게 신바람이 나고 재밌더라고요. 농활 주체도 했고 학교 농추위(농민학생연대추진위원회) 위원장도 맡게 됐죠. 결국 여기(안남면)로 내려왔습니다."
1989년, 25살이었다. 당시 안남에는 농민회도 없었다. "평생 농사짓고 살 거니까, 농사 배우면서 천천히 농민회를 꾸리면 되지 않을까" 싶어 본인의 마음은 편했다. 빈집에 들어가살며 남의 농사도 돕고, 논밭에서 지역 어르신들께 인사하며 농민이 됐다.
▲ 지역 농민들과 함께 한 송윤섭의원. 농민회는 그의 뿌리와도 같다 |
ⓒ 이하나 |
"농촌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안남어머니학교 20년
송윤섭 의원의 가장 두드러지는 이력은 '안남어머니학교' 교장선생님이다. 2000년대 초 주민자치활동을 새롭게 고민하던 즈음이었다. '농촌에서 지금 제일 재미없게 사는 사람들, 가장 시급하게 챙겨야 할 사람들이 누군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외되고 있는 여성 농민들이 눈에 밟혔고 사람들과 학교를 준비하며 교장선생님 되기를 자처했다. 한글학교라고 이름붙이면 어머니들이 선뜻 신청하는 데 불편할까 싶어 이름도 어머니학교로 지었다.
▲ 송윤섭의원은 2003년부터 안남어머니학교 교장선생님을 지냈다. 사진의 버스가 지역 주민들이 가장좋아하시는, 학교를 오가는 마을버스. |
ⓒ 송윤섭 |
"어머니학교를 시작으로 지역 자치활동의 폭이 넓어졌어요. 도서관도 만들고, 마을협동조합도 만들고, 버스도 생기고. 어머니들 스스로가 당사자로서,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죠."
글을 배울 수 없었던 사연을 품고 살던 여성 농민들은 자신의 삶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어머니학교 학생들은 지역 공동체의 주인공이자 자랑이 됐다. 각종 매스컴과의 인터뷰에서 "방학은 싫다, 졸업은 더 싫다"고 말하며 "나이 70 먹고 80 먹은 지금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말한다.
▲ 선거 당시 안남어머니학교 학생이 송윤섭 후보에게 적어준 글. '잘생긴 우리 안남어머니학교 교장전생님 꼭 당선돼세요' |
ⓒ 송윤섭 |
"우리가 농민 정치인 만들어보자" 농민들의 결심
안남에 내려온 이후 계속 농민운동과 주민자치활동을 해왔지만, 정치를 할 마음까지는 없었다. 그러던 2020년, 당시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을 민중당(진보당의 전 이름)의 비례대표로 추천하며 농민의원으로 만들자고 지역 농민회가 똘똘 뭉쳤다.
'농민 정치세력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지방선거도 준비해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농민을 대변하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우리 안남에서도 한번 해보자."
정작 후보로 추천받은 송윤섭 의원은 고심했지만, 농민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고. 궂은 농사일에 익숙한 그였지만 정치인처럼 인사하고 악수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정작 농민들은 그가 출마하면서부터 '이번엔 될 것 같다'고 기대했다. 농민회 회원들이 가장 열정적인 선거운동원이 되었다. 농민들의 바람대로 현역의원 출신 후보들을 제치고 1등으로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선거구는 물론, 28.16%로 옥천군 전체 득표율 1위까지 차지했다.
주민자치에서 직접정치로, '농민 의원'의 꿈
당당하게 군의회에 입성했지만 초선 의원의 길은 쉽진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이 번갈아 집권하며 만들어온 지역 의회의 틀도 견고했다. 그러나 송윤섭 의원은 지역에서 30년 동안 만들어온 주민자치의 힘을, 농민의원으로 소화해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주민자치는 '민'의 힘을 받들면 됩니다. 정치는 이것을 행정으로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들만의 파워게임이 강하니 쉽지 않다는 걸 알았죠. 첨엔 공약부터 조례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조급하기도 했지만, 제 실적이나 지명도를 높일 것도 아니고 4년 동안 농민들의 생활에 밀착한 정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니 차분해졌습니다. 그동안 주민자치활동에서 추구해 온 것들을 행정에 녹이기 위한 방법을 연구해야죠."
농민의원으로서의 그의 꿈은 열악하고 소외된 농민들을 위한 정치와 행정을 만드는 것, 그래서 '농촌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많이 생산하는 농민도 중요하지만, 경제적으로 열악한 농민들을 위한 정책이 더 필요합니다. 옥천만 해도 1헥타르(ha) 이하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80%는 되는데 대부분 고령이에요. 이런 분들의 생산행위가 지속되도록, 즉 계속 농사지으며 살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농업이 유지되는 것이고요.
농촌이 단지 생산의 현장이 아니라 삶의 현장이 되도록, 즉 농촌이라고 하는 공동체가 유지되도록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어려운 사람일수록 공동체가 꼭 필요하거든요. 농촌의 마을공동체, 경제공동체를 지원하는 체계도 있어야 하고, 돌봄 정책도 필요합니다. 그런 조례와 정책을 만드는 농민의원이 되고 싶습니다. 진보당이 집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밑바닥 정치, 현장의 정치가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 평생 농사짓고 살고 싶다던 송윤섭 의원은, 이제 농민의원으로서의 꿈을 꾸고 있다 |
ⓒ 이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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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진보당은 지방자치위원회(위원장 장진숙)를 두고, 지역정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지방의원> 연재기획은 지방자치위원회 편집팀에서 공동 취재해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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