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X이석준 “무대 위 스크루테이프가 당신을 유혹합니다”
“문화예술 도구로 복음 녹여 내는 게 소명”
‘야긴과 보아스 컴퍼니’의 첫 프로젝트
솔로몬 성전 앞 현관엔 놋으로 만든 두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성경은 그 이름을 ‘야긴과 보아스’(대하 3:17)로 기록한다. 히브리어로 ‘그가 세우신다’(야긴)와 ‘그에게 능력이 있다’(보아스)란 뜻을 지닌 두 기둥은 맡겨진 소명을 위해 합력하는 두 주체를 비유할 때 익숙하게 등장한다. 공연 예술 분야에서 다양한 역할로 변주하며 삶의 악보를 그려온 두 사람에게선 영락없는 야긴과 보아스의 합이 엿보였다. 배우, 영화감독, 연극 연출자 등으로 선 굵은 필모그래피를 채워온 이석준 추상미 부부 얘기다.
지난달 29일 국민일보 스튜디오에서 만난 두 사람은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이자 영문학자, 소설가인 C S 루이스(1898~1963) 얘기부터 꺼냈다. 그럴 만했다. 각자의 작품 활동을 펼치며 서로를 응원했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공동제작해 무대에 올리게 된 작품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1942)이기 때문이다. 6일 초연을 앞둔 연극 ‘스크루테이프’와 작품을 든든하게 받쳐 들게 된 두 기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작품 소개부터 부탁드린다.
추상미: 명작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각색한 작품이다. 악마에 대한 재치 있는 상상력, 환자(인간)를 원수(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과정에 담긴 철학을 위트 있게 무대 위에 선보일 예정이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청년과 다음세대를 아우르는 공연’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다음세대에겐 ‘편지’란 매개체가 거리감을 줄 수 있겠다 싶어 원작 제목에서 뺐다. 무대 위 연출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석준 배우는 2020년을 무대 위 C.S. 루이스로 살았다. 이번엔 그의 작품의 연출자로 나섰다.
이석준: 연극 ‘라스트 세션’에서 루이스 역을 맡았던 게 큰 임팩트를 줬다. 배역을 맡게 된 과정도 운명적이었고 대중적 연극 1번지인 서울 대학로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라고 외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적 같았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10여년 전부터 1인극을 시도해보려고 만지작거리던 작품이다. 편지 한 장만으로도 20~30분짜리 메시지를 담을 수 있어서 마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할아버지로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다.
‘라스트 세션’ 공연 이후 주변에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공연으로 올려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20분짜리 쇼케이스를 준비했다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공연을 3일 전 취소해야 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상미씨와 각자 이끌어오던 회사를 합치게 되고, 합작한 회사의 지향점을 살리는 첫 프로젝트로 ‘스크루테이프’를 선택하게 됐다. 예정했던 시점보다 더 빨리 작품이 무대에 올라가도록 연초에 초연이 잡히는 등 일련의 과정이 폭풍처럼 진행됐다. 돌아보면 모든 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 같다.
-합작 회사인 ‘야긴과 보아스 컴퍼니’ 얘기도 궁금하다
석준: 예전에 성경 공부하다 두 기둥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면서 언젠가 공연과 영화 분야에서 회사를 운영하고 동역하게 되면 ‘야긴과 보아스’로 하면 좋겠다는 얘길 나눈 적이 있었다. 그후에 상미씨가 영화 공부하던 대학원 시절에 ‘신과 함께 가라’(2003)라는 독일 로드무비를 보고 공연을 제작하고 싶어서 작가, 작곡가와 의기투합해 2007년 만든 회사가 ‘야긴 컴퍼니’다.
상미: ‘보아스 필름’은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폴란드로 보낸 전쟁고아와 폴란드 교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을 제작하는 과정에 설립된 회사다. 사실 우리 부부는 일상에서 징그럽게 싸운다(웃음). 싸우면서도 계속 예술적 콘텐츠, 신앙적 방향성에 대해 토론한다. 그 과정에서 언젠가 합쳐질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활동하던 두 공동체가 올해 하나로 구현된 게 ‘야긴과 보아스 컴퍼니’인 셈이다.
-루이스의 여러 작품 중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상미: 루이스가 신화적 상상력을 갖고 그 안에 복음을 녹여낸 작품이 ‘나니아 연대기’다. 세상과 복음을 연결하는 ‘브리지’ 역할을 루이스가 했다. 문화예술 콘텐츠가 불의한 제물이 될 수도 있는 게 요즘 시대다. 우리 또한 문화예술을 도구로 복음을 녹여내는 일에 소명이 있다. 상징적으로 첫 작품을 루이스의 것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첫 단추가 ‘스크루테이프’다. 기독교, 교회, 십자가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에게도 ‘악마’는 흥미로운 캐릭터 아닌가. 비신자들이 볼 때도 거부감 없이 흥미롭게 다가설 수 있는 작품이 될 거라 확신했다.
-스크루테이프가 보내는 여덟 번째 편지에는 ‘예수가 진짜로 아끼는 이들은 깊은 골짜기를 지나온다’는 내용이 나온다. 크리스천 관객에게 전할 수 있는 시대적 메시지도 있을 것 같다.
상미: 팬데믹을 지나면서 세상의 콘텐츠들이 기독교를 조롱하는 모습이 트렌드로 나타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크리스천들은 앞으로 나아가 새로운 출구를 찾을지, 그냥 도태될지에 대한 골짜기 앞 기로에 서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큰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영성가와 예술가들을 쓰셨다. 최근 문화예술가 그룹에서 성경공부 모임들이 활발해지고 있다. 시대를 깊이 성찰하고 일깨우는 선지자적인 아티스트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석준: 문화예술계에서도 골짜기가 느껴진다. 과거의 연극 무대는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지적 향유와 통찰, 영향력을 보여줬는데 지금은 걸림돌이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아주 오래 전 얘기를 하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 얘기를 하거나 판타지를 쏟아낸다. 공격받지 않으려면 시대를 뛰어넘는 수밖에 없다. 이번 작품을 2023년을 시작하는 첫 주에 무대에 올리게 됐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느껴진다.
-출연 배우들과의 소통 과정은 어땠나.
석준: 연출을 결심한 뒤 루이스의 작품을 겉핥기 식으로 이해하는 배우들과는 작품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배우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던 순간이 명확해야 가능한 부분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성경공부를 함께 해왔던 그룹 안에서 신중하게 배우를 선택했다. 물론 연기력에서도 믿고 볼 수 있는 명품 배우들이라고 감히 보증한다. 매일 연습 전에 함께 큐티(QT) 하고 눈물 흘리면서 이 작품을 대하는 순전함을 느꼈다.
-다른 작품과 비교했을 때 무대 위 차별성이 있다면?
석준: 무대 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메시지를 담아야 지루하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80년 전 루이스는 편지라는 형식의 글을 라디오 방송으로 전했다. 요즘 시대에 가장 익숙한 방식은 SNS와 유튜브 방송이라고 생각했다. 카메라와 영상을 활용한 ‘라이브 스트리밍’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무는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ce theater)’를 접목했다. 무대를 보면 마치 방송 스튜디오에서 구현되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 마디
상미: 다음 달 4일까지 공연이 진행된다. 이번 공연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문장이 ‘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해 악마의 마음을 엿보다’이다. 관객들이 ‘무의식적으로 내 감정이라 느끼고 있었던 게 외부의 어떤 존재들에 의한 것이구나’라는 걸 성찰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석준: 경계했던 게 있다. 세상이 악하고 힘들어졌을 때 크리스천들끼리 뭉쳐서 견고한 성을 쌓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은 그와 반대다.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셔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보여주셨고 어떻게 사는지를 손수 가르쳐주셨다. 이 작품을 통해 크리스천들이 웃으며 동시에 아팠으면 좋겠다. 거기서 오는 각성이 예술의 고귀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스크루테이프’가 아주 작은 겨자씨처럼 심어져 선한 콘텐츠가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야긴과 보아스 컴퍼니’뿐 아니라 제2의 제3의 극단에서도 이 같은 작품을 이어서 무대에 올릴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지길 소망한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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