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위기는 2023년부터? 재무통 전진 배치한 재계…현금 확보 사활
2023년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고 금리 급등으로 이자 부담이 늘자 상당수 대기업이 보유 자산 매각 등 현금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현금이 왕’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재계에서는 재무통 CFO들이 전진 배치되는 모습이다.
롯데도 유동성 비상
재계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각 그룹은 현금 확보에 총력전을 펴는 중이다.
가장 적극적인 그룹은 재계 2위인 SK그룹이다. 최근 SK E&S의 100% 자회사인 부산도시가스는 이사회에서 부산 사옥 등을 대우건설 컨소시엄에 6328억원에 처분하기로 했다. 매각 대상 부동산은 부산도시가스 사옥과 남천동 메가마트, 아웃백스테이크, 빕스 매장 부지 등으로 3만606㎡(건물 면적 5867㎡)에 달한다. 회사 측은 “보유 자산 매각으로 자산 운용을 효율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배경을 밝혔다. 부산도시가스를 포함 SKC(1조5950억원), SK온(6935억~1조3200억원), SK(2900억원), SK텔레콤(3100억원), SK리츠(1090억원) 등 최근 SK그룹 각 계열사가 마련한 유동성만 4조2000억원이 넘어간다. SK그룹이 유동성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경영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한편, 투자 계획을 차질 없이 준비하려는 선제적 과정의 일환이라는 게 재계 분석이다. SK그룹은 2026년까지 반도체, 바이오 등 핵심 성장 산업군에 총 247조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안정적인 재무 정책으로 잘 알려진 롯데그룹마저 전방위적으로 유동성 확보에 나서자 바짝 긴장한 분위기다. 롯데호텔은 보유 중인 롯데칠성음료 주식 27만3450주(2.72%)를 전량 매각했다.롯데건설은 국내 은행 2곳에서 3500억원을 차입했고 롯데케미칼에 5000억원 등 계열사로부터 1조원가량 빌렸다. 최근 단기 자금 시장 경색이 다소 풀리면서 일부 대여금을 상환했다.
현대백화점그룹도 현대홈쇼핑이 100% 보유 중이던 현대렌탈케어 지분 80%를 사모펀드 운용사인 시에라인베스트먼트에 매각했다. 현대렌탈케어는 정수기와 공기청정기, 비데 대여 사업을 하는 계열사다.
이외 상당수 기업이 비핵심 자산, 보유 부동산 등을 잇따라 매각하고 있다. 코오롱그룹 계열사인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인천공장 토지를 부동산 개발 업체에 550억원에 매각했다. 코오롱인더스트리의 100% 자회사인 코오롱머티리얼은 대구 염색 공장을 스틱얼터너티브자산운용에 500억원에 처분한다. 한진그룹 계열사 칼호텔네트워크는 제주KAL호텔을 950억원에 매각한다. HJ중공업은 인천 서구 원창동 토지와 건물을 770억원에 처분하기로 했다. KG스틸은 유휴 설비인 당진공장의 전기로 설비를 영국 제철 업체인 리버티스틸그룹에 907억원에 처분했다.
지난 연말 재계 인사에서 재무통이 전진 배치된 것도 현금흐름 관리가 최우선 과제로 대두됐기 때문이다.
SK그룹은 이성형 SK CFO를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이 사장은 재무 정책뿐 아니라 사업 포트폴리오 관리까지 총괄한다. SK C&C 사장으로 승진 선임된 윤풍영 전 SK스퀘어 최고투자책임자(CIO)도 SK텔레콤 CFO를 거친 재무통이다. LG그룹에서도 차동석 LG화학 CFO 겸 최고위기관리책임자(CRO)가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외에도 이창실 LG에너지솔루션 CFO 겸 최고전략책임자(CSO)가 부사장, 박지환 LG CNS CFO는 전무로 승진했다. 현대차그룹도 주요 계열사 대표이사 자리에 재무통을 앉혔다. 이규복 현대차 프로세스혁신사업부 전무는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동시에 현대글로비스 대표 자리에 올랐다. 이 대표는 현대차 미주 지역 생산법인 CFO를 경험한 재무, 해외 판매 전문가다.
금리 ‘피크앤하이’ 오래갈 듯
재계가 현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진짜 위기는 2023년에 올 것이라는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 2~3년 전 코로나 확산에 따른 저금리 국면에서 상당수 기업이 회사채를 앞다퉈 발행했는데 이 회사채 만기가 2023~2024년 대거 돌아온다. 재계 재무팀 관계자는 “통상적인 경기 상황이라면 만기 회사채 물량은 대개 차환에 나서지만 최근 금리가 너무 올라 보유 현금으로 상환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안다”며 “작금의 회사채 시장은 AA등급의 우량 기업조차도 수요 예측을 전혀 낙관할 수 없는 분위기인 만큼 수요만 있다면 발행 계획보다 무조건 늘리자는 게 전반적인 재무 정책 기조”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재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재고가 한 달 반에서 두 달가량 잠겼을 때 버틸 수 있는 수준을 적정 현금 보유량으로 본다. 문제는 원자잿값 급등에 대비해 선제적으로 재고 확보에 나섰다가 현재 과잉 재고 상태에 놓인 기업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반면, 경기 침체 우려로 현금흐름은 갈수록 둔화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기업이 계속기업으로 경영 활동을 이어가려면 결국 현금흐름이 원활해야 한다. 재고를 팔아 매출채권을 찍고 다시 현금이 유입되는 선순환이 원활히 작동해야 하는데, 지금은 이런 흐름에 제동이 걸린 상태다. 사정이 이렇자 경기 침체가 끝날 때까지 일단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유동성을 확보하자는 분위기가 대세다.
특히 금융 시장에서는 주요국 중앙은행의 강력한 긴축에 따른 실질적인 영향은 2023년 하반기부터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기준금리가 인상되더라도 시차(lagging)가 존재하므로 실물 시장에 반영되기까지는 시일이 소요된다. 전문가들은 과거 위기 사례에 비춰 고금리에 따른 스트레스 기간이 본격 도래하는 데 대략 1년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본다.
금융 시장에서도 연준의 금리 인상 기조가 완화될 것이라는 당초 낙관적 전망과 달리 높은 수준의 금리가 상당 기간 유지되는 ‘피크앤하이’ 패턴이 펼쳐질 것으로 내다본다. 미국의 고용 시장 구조 변화와 공격적인 ‘리쇼어링’ 정책 등으로 미국 고용과 소비 시장은 여전히 견고하다. 고용, 소비 시장을 일정 수준 냉각시키려 금리를 올리는 통화당국의 정책 목표와 자국 일자리를 늘리려는 산업 정책이 상호 충돌하면서 정책 간 ‘트레이드오프’가 빚어진다는 지적이다.
이런 이유로, 연준이 시장의 당초 예상과 달리 2023년 금리 수준을 5%보다 높일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최종 도달 금리는 시장 전망치를 웃돌 수 있다는 전망이다. WSJ는 연준이 금리를 시장 예상보다 빨리 올렸다 서둘러 내리는 전략과 천천히 높은 수준으로 올려 이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전략 가운데 후자 쪽을 선호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연준은 이 같은 예측에 가까이 다가섰다. 2022년 12월 FOMC에서 연준은 2023년 최종 기준금리 수준을 5.1%로 상향 조정했다. 이는 물가 상승률이 정점을 찍었던 2022년 9월 연준이 제시했던 2023년 최종 금리 수준 4.6%보다 0.5%포인트 더 높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연준 기준금리가 연 5%로 오른다면 위기의 절정은 2023년 하반기에 올 수 있으며 개인과 기업은 최대한 현금을 확보하고 정부는 시장 안정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91호 (2022.01.04~2023.01.1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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