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 경쟁 중에 흥국생명 또... 이쯤되면 김연경과 악연
[이준목 기자]
▲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사령탑에서 물러난 권순찬 감독 |
ⓒ KOVO |
여자배구 흥국생명의 권순찬 감독의 전격 경질이 배구계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흥국생명은 지난 1월 2일 권순찬 감독, 김여일 단장의 동반 사퇴를 발표하며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권 감독과 헤어지기로 결정했다"라고 밝혔다.
배구계와 팬들 모두 황당하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흥국생명은 2022-2023 시즌 개막 후 3라운드까지 18경기 14승 4패, 승점 42점으로 1위 현대건설(승점 45)과 함께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지난해 33경기서 10승 밖에 거두지 못하고 7개 구단 중 6위에 머물렀던 흥국생명은, 돌아온 '배구 여제' 김연경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며 정규리그 우승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프로스포츠계에서 감독교체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명분과 절차는 있어야 한다. 권순찬 감독의 경질은 지난 2021년 IBK 기업은행의 서남원 감독 경질을 둘러싼 조송화-김사니 사태와 비견될 만큼 여자배구계에 명분없는 감독교체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더구나 현재 흥국생명은 성적이 나쁜 팀도 결코 아니고 관중동원에서도 전체 1위로 흥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난달 29일에는 선두 현대건설과의 수원 원정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며 한층 기세를 높였다.
지난해 3월 박미희 감독의 후임으로 흥국생명의 지휘봉을 잡은 권순찬 감독은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한 시즌도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감독직에서 쫓겨나게 됐다. 권순찬 감독에 대하여 '김연경 빨'로 성적을 냈다거나, 유연하지 못한 선수 운용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도 있었지만, 이는 어느 감독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비판에 가까웠다. 누가 봐도 당장 지휘봉을 반납시켜야 할 정도로 성적이 나쁘거나 치명적인 흠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권순찬 감독은 왜 경질 당했나?
흥국생명 구단이 감독경질의 근거로 내세운 '방향성'의 구체적인 내용과 근거도 모호하다. 권순찬 감독은 검증된 베테랑을 중심으로 경기를 운영했는데, 젊은 선수들을 더 중용하길 원했던 구단 또는 모기업과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다는 것이다. 성적이 좋지 않거나 리빌딩-세대교체가 시급한 상황이었다면 구단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흥국생명은 순항중이었고 우승에 도전하는 팀이었다. 상식적으로 김연경이라는 톱스타를 보유한 팀이라면 '윈나우'를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
선수단과의 관계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는 권 감독이 경질된 이후 간판스타인 김연경을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이 구단에 보이콧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반발하는 분위기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에 권순찬 감독이 경질 후 그동안 구단의 부당한 지시가 있었음을 폭로하며 파문은 더 커지고 있다. 권 감독은 KBS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구단 고위층이 선수 기용에 개입을 해왔고, 부당한 지시라고 생각해 거부해왔다"고 주장했다.
현대 프로스포츠에서는 현장과 프런트, 모기업의 영역을 정확히 구분하며 설사 구단주라고 할지라도 선수기용이나 전술같은 현장의 영역에 함부로 간섭하는 것은 금기로 여겨진다. 권 감독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흥국생명은 1970~1980년대에도 용납되기 어려울 후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만행을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 안타까운 것은 흥국생명과 배구계에서 이런 황당한 사태가 처음이 아니라는 데자뷰에 있다. 흥국생명은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고 황현주 감독을 2006년과 2008년, 무려 두 번이나 경질하는 해프닝을 일으킨 바 있다.
1차 경질 때는 당시 김연경을 중심으로 흥국생명이 선두를 달리고 있던 시점에 우승 경험 있는 감독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김철용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겼다. 김 감독이 선수단과의 불화로 물러난 이후 황 감독은 다시 복귀하여 흥국생명을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2008년 12월 말 부상 선수 관리와 선수 운영에서 구단과 이견을 보여 또 경질됐다. 당시에도 프런트가 성적을 위하여 부상중인 선수들을 조기 복귀시키라고 요구했으나 황 감독이 이를 거부하여 경질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우수한 성적-윗선의 부당한 지시 거부'로 이어진 두 번의 황현주 경질 사태를 종합하면 바로 지금의 권순찬 감독 사례와 흡사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후 흥국생명은 한동안 잦은 감독교체를 거듭하며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올해 '김연경 복귀효과'를 앞세워 모처럼 성적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사냥하고 있던 흥국생명은 또다시 자충수에 빠지며 팬들로부터 '흥국이 흥국했다'는 조롱을 받고 있다.
▲ 동료 실책에 아쉬워하는 김연경 20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핑크 스파이더스와 GS칼텍스 KIXX 배구단의 경기. 5세트 흥국생명 김연경이 동료 실책에 아쉬워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사실 흥국생명이 그동안 감독교체 외에도 비상식적인 행태로 각종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흥국생명은 김연경이 전성기에 해외무대에서 활동하던 당시 FA자격 문제를 놓고 장기간 법정다툼을 벌이며 세계적인 선수의 해외진출을 가로막는다는 국민적 비판에 휩싸이며 부정적인 의미에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또한 2021년에는 이재영-이다영 자매의 학교폭력 논란이 불거지며 안이한 대처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선수등록을 추진하다가 팬들의 반발에 밀려 마지못해 철회하기도 했다.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흥국생명은 결국 그해 우승에 실패하며 무관에 그쳤다.
특이하게도 흥국생명은 배구팬들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호성적과 관중동원에도 불구하고 구단 자체의 인기와 이미지는 별개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팀이다. 보통 프로스포츠 꾸준히 좋은 성적을 올리고 스타가 많은 팀이라면, 구단 자체를 좋아하는 연속성있는 팬덤이 형성되는 것을 감안할 때 상당히 특이한 사례라고 할수 있다.
이는 흥국생명을 응원하는 팬들의 대부분은 김연경같은 선수들 때문에 응원하지, 구단이 좋아서 응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흥국생명이 보여준 수차례의 잘못된 행보와 논란 때문에 구단에 대한 비호감 이미지가 높아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기업들이 스포츠단을 운영하는 궁극적 이유는 결국 기업의 이미지 개선과 홍보효과에 있다. 그런데 정작 흥국생명은 오히려 자신들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먹고 있는 자충수를 거듭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간판스타 김연경은 하필이면 흥국생명 소속이었던 시절마다 번번이 원치 않는 논란에 휩싸이며 '흥국생명의 최대 피해자'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선수생활 후반기에 다시 국내 무대로 복귀하여 우승을 노렸던 김연경의 '라스트 댄스'에 구단이 지원은 못해줄망정, 또다시 찬물을 끼얹는 모양새가 된 것을 두고 팬들이 더 안타까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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