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속 장소 이야기⑭] 고종의 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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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俄館)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으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러시아를 상대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아관파천은 러시아 공사관 인근에 자리한 미국 및 영국 공사관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반면 러시아를 통해 전달된 소식에서는 아관파천의 배경이 을미사변에 있으며, 1월 20일 일본 히로시마 군법회의에서 그 살인자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점을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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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俄館)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사에서 ‘아관파천’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안전을 위한 것이지만, 청일전쟁 이후 조선을 사실상 보호국화하려던 일본의 야욕을 한순간에 흔드는 묘수라고 할 수 있었다. 아관파천으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러시아를 상대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아관파천은 러시아 공사관 인근에 자리한 미국 및 영국 공사관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각국 공사관에서는 서울에서 벌어진 사건을 전신으로 본국에 타전하였다. 이 소식은 일본을 통해 영국과 미국 신문에도 소개되었다. 불과 이틀 후인 2월 13일에는 대신이 군중에게 살해당하였고, 조선 국왕과 왕세자 등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영국과 미국 등의 언론에서 아관파천을 소개하면서 사용한 주요 표현은 ‘반란’, ‘폭동’ 등을 의미하는 ‘uprising’, ‘rising’, ‘revolt’ 등의 단어였다. 지극히 일본의 입장을 대변한 내용이었다. 반면 러시아를 통해 전달된 소식에서는 아관파천의 배경이 을미사변에 있으며, 1월 20일 일본 히로시마 군법회의에서 그 살인자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점을 보도하였다.
하지만 영국 정부에서 주목한 내용은 러시아가 고종을 배경으로 조선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이었다. 아관파천 직후 영국 의회에서 이와 관련한 질의가 오가면서 가장 핵심은 조선이 러시아의 보호국이 될 가능성이었다. 실제로 조선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이유와 보호 목적으로 서울에 진주한 러시아 군대의 동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에 러시아군이 증원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병력은 정동에 자리한 영국 공사관 병력뿐이었다. 다만, 영국 외무차관은 현재 러시아군만으로는 서울을 점령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답변하였다. 왜냐하면 서울에는 대규모 일본군이 이미 주둔 중에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외교적 측면에서도 접근하였다. 이를테면 1886년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당시 러시아와 합의한 내용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의 여부 등에 대한 것이었다. 1885년 거문도 사건 당시 영국과 러시아는 ‘영국은 거문도에서 철수해야 하며 러시아는 앞으로 조선의 영토를 취하지 않는다’는 사항에 대해 합의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영국 외무 차관은 이 합의 사항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영국 정부는 판단하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아관파천은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 야욕을 흔들 수 있는 절호의 한 수라고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국제 관계를 살펴보면 불과 몇 년 전에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하는 등 러시아의 동북아시아 진출을 극도로 우려하였다. 이것은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의 한 수는 일본이 영국 등과 연계할 수 있는 빌미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을미사변 이후 일본이 경복궁에 사실상 고종을 억류된 상태에서 국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한다 해도 통치자로서 고종이 가진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행보는 매우 중요했다. 자칫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을 러시아의 팽창에 대항하는 세력의 중심으로 성장하는데 디딤돌이 될 수도 있었다. 안타깝게 고종은 판을 흔들 수 있는 묘수를 계속 이어가지 못하였고,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일본 간의 세력 다툼에서 방관자로 내몰렸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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