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이 총격테러 범인? 한 어머니의 긴박한 질주
[김성호 기자]
▲ 패닉 런 포스터 |
ⓒ (주)원더 스튜디오 |
흔히 사람들은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돼야 최고의 성과가 나온다고 믿기를 즐기는 듯 하지만 현실은 다를 때가 많다. 때로는 제 자유를 억압해서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만나는 것이다. 영화 가운데서도 그런 작품이 없지가 않다.
총천연색 칼라영화가 흔한 일이 된 21세기에도 흑백으로 영화를 찍는 이들이 있다.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레토> 같은 명작이 모두 스스로 색채를 제한한 흑백으로 촬영됐다. 한국에서도 이준익의 <동주>와 <오! 수정> 이후 쏟아진 홍상수의 작품들이 의도적으로 흑백화면을 활용해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공간을 제약하는 작품도 있다. 시드니 루멧의 < 12인의 성난 사람들 >은 형사재판 배심원실이란 좁은 공간 안에서 피고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토론을 담았다. 로드리고 코르테스의 <베리드>는 제가 어디 묻힌지 모르는 사내가 매장된 관 속에서 전화기 하나를 들고 제 목숨을 구하려는 긴박한 순간을 그린다. 얀 드봉의 <스피드>는 폭탄이 설치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며 조엘 슈마허의 <폰 부스>는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전화를 끊지 못하게 된 사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한국에도 비슷한 영화가 적지 않은데 개중 가장 성공한 작품이 김병우의 <더 테러 라이브>일 것이다. 귀에 설치된 인이어에 폭탄이 들었단 설정으로 테러범과 뉴스앵커 사이를 시종 흥미진진하게 오가는 작품으로, 제약이 도리어 영화를 긴장감 넘치게 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알고 만든 흥행작이라 하겠다.
▲ 패닉 런 스틸컷 |
ⓒ (주)원더 스튜디오 |
여기 제한된 환경에서 긴장을 끌어내는 또 한 편의 영화가 있다. 전화기를 쥐고 산길을 달리는 주인공은 지구 마지막 유인원이 사랑했던 여인이자 쓰나미 몰려오는 휴양지에서 삶을 건 분투를 했던 명배우 나오미 왓츠다. 그녀가 이번엔 한참을 달린 아침 운동길 막바지에 아들의 학교에서 총기난사 테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지난해 있었던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에이미(나오미 왓츠 분)다. 가족들은 그 슬픔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했는데, 이번엔 아들까지 잃을지 모른단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는다. 남편이 떠난 뒤 엇나가기만 하는 아들이다. 아침에도 일어나지 않는 아들을 닦달하여 학교에 가라 했던 것이다. 동급생 딸을 둔 동네친구는 에이미의 아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던 듯 별 반응을 않지만 머릿속이 어지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억지로 붙들고는 있지만 제 마음도 남편이 떠난 뒤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나.
▲ 패닉 런 스틸컷 |
ⓒ (주)원더 스튜디오 |
아들의 생사를 건 엄마의 위급한 달리기
멀찍이 달린 데다 경황이 없는 중에 다리까지 다친 에이미는 아들의 학교까지 갈 수가 없다. 차 한 대 지나지 않는 외딴 동네에 홀로 떨어져 의지할 거라곤 전화기 하나뿐이다. 시급을 다투는 소식은 그녀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다. 아침까지만 해도 누워있던 아들이 제 말을 듣고 학교에 갔을까, 수차례 전화를 해보아도 아들은 받지 않는다.
영화는 에이미가 아들의 학교까지 가는 과정을 긴박하게 잡아낸다. 그 과정에서 소방대원이며 경찰, 카센터 직원과 학교 선생님까지 여러 인물들이 등장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다.
▲ 패닉 런 스틸컷 |
ⓒ (주)원더 스튜디오 |
몇가지 단점만 감안할 수 있다면
제목 그대로 패닉이 된 채 달리는 영화다. 아들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알려지기도 전에 충격과 공포에 빠져야만하기에 그녀는 여적 가족의 상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여자로 설정되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영화는 과한 설정이며 지나친 캐릭터가 아니냐는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몇 가지 단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패닉 런>의 제 몫은 하는 영화란 걸 부인할 수는 없다. 제약된 환경 가운데 끝없이 달리는 여자, 그 여자가 제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제가 알고자 하는 정보에 닿으려는 노력, 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84분이란 짧은 러닝타임이 가득 메워지기 때문이다.
앞에 언급한 스스로를 제약한 명작들에 미칠 만한 작품이라 보증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수많은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 84분의 짧은 시간을 흥미진진하게 보내게 하는 제법 잘 짜여진 이야기란 건 분명하다 하겠다. 이 시대의 영화란 것이 꼭 전인미답의 눈밭에 발자국을 새기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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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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