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에 피신한 후 공사관으로 돌아오다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김선흥 기자]
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1884년 12월 13일 오후 이천-서울간 길 위에서 만났던 관리의 이름은 장운이었고 직함은 선전관이었습니다. 왕실의 신하였지요. 그는 내게 일단 피신을 위해 남한산성으로 가는 게 좋겠다면서 보부상과 병사들을 부르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마치 망망대해에서 뗏목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죽을 상을 하고 있던 가마꾼들이 돌연 활력에 넘쳤습니다. 막걸리를 몇 잔 들이킨 후 가마를 맨 그들의 목소리는 우렁찼습니다, "에라이, 에라이.."
좀 있으니 밀짚모자를 눌러쓴 보부상들이 바람처럼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잘 훈련되고 조직된 비밀 별동대 같았습니다. 눈 덮힌 길에 땅거미가 졌습니다. 백성들이 횃불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바위 투성이의 협곡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마지막 힘을 다 짜낸 가마꾼들의 외침소리가 계곡에 메아리쳤습니다.
눈 덮힌 계곡을 이동하는 횃불의 행렬과 밀짚 모자를 눌러 쓴 사내들의 그림자가 어우러져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진기한 광경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피난을 가는 중이었습니다. 밤이 깊어 산성에 도척했습니다. 불과 두 달 전인 지난 10월 이곳에 들렀을 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산성을 다시 찾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지요. 나의 머리 속에는 온갖 상념이 교차했습니다.
산성에서 밤 10시에 저녁 밥이 나왔습니다. 음식과 술이 일품이었습니다. 나는 서울의 상황이 궁금하여 선전관 장운에게 물었고 그는 눈 앞에 보듯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한국 역사서에 '갑신정변'이라 기록된 바로 그것입니다. 선전관의 진술을 나는 최대한 충실히 일기에 기록하였지요.
여기에서 그 내용을 반복하지 않겠지만 선전관의 개인적인 논평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갑신정변 세력을 포함한 개화파들을 '놈Nom'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일본 혐오는 깊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갑신정변 주역들을 천하무도한 역도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반면에 청나라에 대한 숭배와 의존심리는 강했습니다. 그는 청나라가 조선의 독립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큰 장애물이라는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약간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어젯밤 어명을 받고 황급히 오느라고 엄동설한에 고초가 심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키피를 한 잔 타 주었고 나의 브랜디와 시가를 주었습니다. 나는 자정이 넘어 기도를 올리고 잠을 청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깊이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 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새벽 2시경에 겨우 잠을 맞이하였지요.
다음날 아침 9시에 잠을 깼습니다. 무장한 두 명의 군관과 군속들이 왔습니다. 고종 임금이 호위군사를 보낸 것입니다. 아침 밥상을 물리고 났는데 공사관의 바나도우 소위가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어젯밤 11시에 임금이 붙여준 호위병과 함께 서울을 출발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한 숨 자지 않고 밤새 달려 온 것입니다. 버나도우는 무척 흥분한 표정으로 사건에 대해 두서없이 설명하더군요. 그는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버나도우는 해군 장교이지만 그 임무는 조선의 전퉁 문물을 수집하여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보내는 일이었지요.
오전 11시 55분 우리는 산성을 나왔는데 그때 나는 무려 400여 명의 호위대 속에 있었습니디. 창검과 화승총, 곤봉 등으로 무장한 군관과 포졸들, 산성의 장졸과 보부상 사내들이 입고 있는 갖가지 복장이 이채로운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우리는 서울 초입의 송파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여기에서 또 왕이 보낸 호위병과 선전관을 만났습니다. 3시 15분 큰 무리를 이룬 우리 일행이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일이가 송파에서 한 마디 말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는 갑신정변의 주역 중의 한 명인 서광범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지요.
늦은 오후, 노란 해가 떠 있는 서울의 하늘에서는 흰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난 6월 2일 이곳에 도착했을 때가 기억에 떠올랐습니다. 그 사이에 몰아닥친 변화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광희문에 이르렀습니다. 초저녁이었습니다. 막 닫히고 있는 성문으로 우리의 호위병들이 달려 갔습니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건 조선인이 아니라 청나라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칼을 빼들고 나와 병사들을 막아섰습니다. 약간의 소란이 일어난 가운데 내가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나의 통행증을 보여 주었습니다. 통행증은 물론 그들의 문자인 한자로 쓰여 있었지요. 그들은 결국 길을 내 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둠이 깔린 거리를 서서히 이동하여 마침내 공사관에 도착하였습니다. 6시 20분 경이었습니다. 공사관이 몹시 조용하여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스쿠더(공사 개인 비서)가 다가와 나를 껴안았습니다. 푸트 공사 부부가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나는 공사에게 선전관과 조선인 동행들을 소개했습니다. 동행 중에는 이천 마을의 통장도 있었습니다. 왕이 보낸 궁중 내시 한 명이 공사관에 와 있었습니다. 나는 10,000푼을 받아서 가마꾼들에게 노임을 너끈히 주고 나니 체증이 내려 간 듯 했습니다. 조선인 동행들에게도 수고비를 주었습니다.
가벼운 식사를 마친 후 11시에 내 방으로 갔습니다. 44일 만에 처음으로 몸을 침대에 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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