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이웃 외면 않는 사람들 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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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환 기자]
▲ 오정숙 원장. 이웃을 위한 꾸준한 봉사활동이 31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금지미용실과 닮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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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고금리, 고물가, 참사, 전쟁 등 나라 안팎으로 전해오는 어두운 소식은 살갗을 파고드는 한겨울 매서운 바람보다 우리들을 더 움츠리게 만든다. 세상살이가 점점 더 팍팍해지고 온정이 식어간다고 낙담하고 있을 때, '그럼 그렇지,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거야!'라는 말을 외칠 수 있는 건 수십 년째 미용봉사를 하는 오정숙(62) 원장과 같은 이웃이 곁에 있어서가 아닐까?
▲ ‘금지미용실’. 1992년 개업했을 때 그 자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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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청이 바라보이는 곳에 '금지'라는 간판을 걸고 31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그는 매월 예산정신요양원(1일)과 예산군장애인종합복지관(11일)을 방문하고 있다.
쇠金, 땅地 '금지'는 천주교 신자인 작은 언니가 수녀님에게 받은 상호라고 한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이름으로 지난 1992년 개업한 뒤 한결같은 동네미용실로 자리잡는 동안, 주위를 향한 사랑은 더 넉넉해졌고, 봉사는 삶의 일부가 됐다. 마치 '금지(金地)'라는 이름처럼.
오 원장은 인터뷰를 요청하자 "다른 유명한 사람도 많은데 제가 뭐라고 인터뷰를 하느냐"며 손사래 쳤다. 더욱이 봉사활동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유난히 쑥스러워하는 모습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진심'이 묻어났다.
▲ 미용실 역사만큼이나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46년 된 고데기(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봉사 현장에서 사용하는 미용도구와 가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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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3년 동안은 미용실 보조역할을 했다. 최소 5~6년은 조수를 해야 했던 때였다. "월급도 적고 힘들어 잠시 사무직일을 하다가 다시 을지로에 있는 속성 3개월 과정 미용학원을 다녔다. 1987년 서울 사당동에서 '세븐미용실'을 개업해 본격적으로 미용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봉사는 어떻게 시작했을까. 미용보조 시절부터 동료들과 함께 고아원 원생들을 대상으로 미용봉사에 나선게 계기가 돼 무려 4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가끔 그때 고아원 원생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지금은 40대, 50대가 됐겠지…"
▲ 거동이 불편한 이웃을 위해 오정숙 원장이 재가방문 미용봉사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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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김혜경 복지관 기획연계팀장은 "의자와 거울이 세팅돼 있지 않은 가정집에서 커트한다는 게 쉽지 않다. 허리도 무릎도 어깨도 불편할 수밖에 없다. 불빛도 어두워 머리카락 처리가 어렵다. 미용봉사를 하는 분들이 재가방문을 꺼리는 이유다. 어떤 경우엔 약속했던 봉사자가 오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며 "그럴 때 흔쾌히 동행하는 분이 오 원장이다. 어려움을 내색하는 법이 없다. 이런 모습을 보고 다른 봉사자들도 '다음 달에는 제가 갈게요'라며 용기를 내는데, 선한 영향력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오 원장은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에는 미용 대상자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사람이 적다. 복지관의 경우 60~70명에서 20여 명으로, 요양원은 90명에서 45명으로 줄었다. 봉사를 하면서는 어려운 점이 없다"며 "처음 발을 들여놓기가 어렵지, 누구든지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할 수 있다. 힘들게 폐지를 모아 판 돈으로 이웃을 돕는 분도 계시는데, 그에 비하면 재능으로 하는 봉사가 힘들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겸손해했다.
예산군자원봉사센터가 2018년 진행한 해외자원봉사에 유일한 미용봉사자로 캄보디아에 다녀온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24명이 3박5일 일정으로 현지 자원봉사활동을 했다. 집을 짓기 위한 봉사팀이었다. 남자들이 집을 짓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미용, 제빵, 아이돌봄 등 각자가 지닌 재능봉사를 펼쳤다"며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봉사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고 당시 경험을 들려줬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사회가 너무 어렵다.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며 자신이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아프리카 가나의 학생 이야기를 전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어려운데 굳이 남의 나라 사람들을 돕느냐'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해외에는 밥을 못 먹고 굶는 아이들이 있다. 우리에게 3만 원은 적은 돈이지만 그 나라 사람들에겐 생존비용이다. 그 돈으로 한 학생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후원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 원장은 이웃을 돕는 보람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애정으로 날마다 행복을 채우며 살아가지만, "지난해는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돌아보니 어영부영 보낸 것 같다. 다시 시간이 주어진다면 여행을 하고 싶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면서 "올해엔 아직 장가갈 나이는 아니지만 제 아이들이 여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 미용실도 잘 돼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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