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선거구제…죽 쑤는 악수(惡手)가 될 수 있다 [정기수 칼럼]
가짜 뉴스, 선동으로 인지도 높이면 돼
선진국 대다수 왜 소선구제 유지하겠나?
‘조폭 거대 야당’에 밥상 차려 주게 될 수도
우리나라가 제헌의회 선거구제로 돌아간 건 1988년 제13대 총선이었다.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의 국회의원만 뽑는 소선구제였다. 결과는? 대한민국이 전라공화국(평민당), 대경공화국(민정당), 부경공화국(민주당), 충청공화국(공화당)으로 좍 갈라졌다.
망국적인 소선거구제라는 개탄이 나왔다. 합리적이고 실력 있는 군인, 학자, 관료, 기업인 출신들이 추풍낙엽처럼 사라졌다. 대신, 평생 한 번도 자기가 번 돈으로 살아 보지 않은 이해찬 등 투사들이 대거 국회에 진출했다.
최대 수혜자는 DJ(김대중)였다. 제13대 총선 넉 달 전 대선에서 YS(김영삼)에 뒤지는 3등으로 정계 은퇴 압박까지 받았으나 소선구제 덕택에 호남을 싹쓸이하면서 수도권 호남 출향민들 표로 모두 70석(지역구 54+전국구 16)을 얻어 기사회생했다.
대선 때와 순위 바꿈을 한 YS는 59석(지역구 46+전국구 13)에 그쳐 제3당 당수로 초라해졌다. 이 구조는 1년 반 후 3당 합당(민정+민주+공화)으로 재편돼 DJ 평민당의 위세가 끝났다.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대선거구제 찬성 의사를 밝히자 ‘소선거구제 폐단’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여서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 지역 특성에 따라 2~4명을 선출하는 방법을 정치 시작 전부터 생각해 왔다. 중대선거구제로 대표성이 더 강화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윤석열이 생각하는 선거구제는 전통적인 중대선거구제와는 종류가 다르다. 지역에 따라 소선구제를 유지하기도 하고,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 3~4명을 뽑는 대선거구제를 혼합하는 방식으로 해석된다.
선거구제를 바꾸려면 총선 예정일 1년 전까지가 법정 기한이므로 올해 4월 10일이 데드라인이다. 3개월 정도에 저 복잡하고,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법 개정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진 않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회의장 김진표가 중대선구제를 선호하고, 현재 국회를 장악해 ‘집권 야당’ 행세를 하는 민주당이 주판알을 잘못(또는 잘) 튕겨 중대선거구제로 선회해 버리면 의외로 쉽게 소선거구제가 없어질 수도 있다.
이게 과연 대한민국을 위해 좋은 일일까? ‘노’라고 답해야 할 이유가 적지 않다. 소선구제는 반드시 악(惡)이고, 중대선거구제는 언제나 선(善)이라는 흑백논리는 위험하다. 특히 지금처럼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하고, 야당이 실점을 많이 해 불리한 상황에서는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소선거구제의 나쁜 점을 말할 때 첫 번째가 과다한 사표(死票)다. 전문성이나 도덕성이 아무리 좋아도 1표 차로 2등이면 떨어진다. 거대 양당에만 좋다. 그러나 군소 정당이 난립하게 되는 중대선거구제는 그 소수 정당들이 선거후 양당에 흡수돼 결국 같은 결과가 될 수 있다.
승자 독식 소선거구제는 지역 구도를 심화시킨다. 전라도는 민주당이 꽂은 ‘막대기’들이 다 차지하고, 경상도는 보수 정당이 휩쓴다. 중대선거구제로 선거를 하면 이런 문제가 간단히 해소될 것인가?
민주당이 호남에서 복수 공천을 하는 걸 상정해 보라. 위장 무소속 후보도 결국 민주당이다. 윤석열 당 후보는 선거구제가 바뀌어도 여전히 고배를 마실 공산이 매우 높다. 소선구제로 2등 했던 후보가 중대선거구제에서 2등이 돼 당선될 것으로 기대한다면 순진한 발상이다.
이런 꼼수를 피하기 위해 호남 대부분과 경상도 다수는 소선구제를 유지하고 수도권이나 충청, 강원에서만 주로 중대선거구제 전환이 많이 이뤄진다면 더 문제다. 저질 현역 의원 심판 기회를 잃게 되는 치명적 결함이다.
국회에서 실소 코미디를 벌이거나 비리 의혹을 받은 자들을 다음 선거에서 탈락시키는 게 소선거구제의 통쾌한 묘미다. 중대선거구제로 하면 민주당 ‘처럼회’, 문재인과 이재명 맹목 충견(忠犬) 의원들이 다 살아날 것이다.
가짜 뉴스나 선동으로 인지도만 높이면 공천과 재선에 유리하다. 결사적인 진영 유권자들은 그들을 무조건 지지한다. 이 또한 망국적 제도 아닌가?
민주당 대표 이재명은 새해 벽두부터 ‘표로 심판하자’라고 벼른다.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각자도생의 원시사회로 돌아가고 있다. 1인 1표의 민주공화국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국민인데, 우리 한 명 한 명이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
원내부대표 진성준은 국회를 이태원 판으로 끌고 가 이재명 방탄도 하고 또 1년 내내 정쟁을 이어 가겠다는 선전포고를 했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기간을 연장하는 것이 과제다. 만일 저들(여당)이 합의하지 않으면 민주당 단독으로 국회를 열어서 연장하겠다.”
이런 사람들이 고스란히 국회에 재입성하고 또다시 ‘조폭 거대 야당’이 재현될 수도 있는 시스템이 중대선거구제다. 위험천만이다.
세계 주요국들이 왜 FPTP(First Past The Post, 결승 말뚝을 1등으로 통과한 말이 우승하는 식의 소선거구제)를 지키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소선거구제는 미국, 영국, 캐나다 등 45개국이 채택하고 있으나 중대선거구제는 아프가니스탄, 라오스, 오만, 쿠웨이트 등 8개국에 불과하다.
선진국들이 소선구제를 유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심판의 명료성이다. 잘한 쪽이 이기고 못한 쪽이 지는 것이다. 잘하건 못하건 동반 당선되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지역 구도 심화도 그 심판의 일부로 간주한다.
내년 총선은 윤석열 국정 중간평가이기도 하지만 갑질 내로남불 586 운동권 금배지들 심판이기도 하다. 최악의 진영 대결이 될 것이다.
중대선거구제는 국회의원 선거를 윤석열 탄핵의 장으로 몰고 갈 저들에게 더 좋은 밥상을 차려 주는 악수(惡手)가 될 수 있다.
글/정기수 자유기고가(ksjung72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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