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보하루천자]걷기로 희소병 아내 살려낸 한상진 교수

조인경 2023. 1. 3.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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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근육 떨림·마비증세
아파트 단지부터 인근 산책길·운동장서 걷기운동
투병과정·증세·감정, 손글씨로 기록했다 책 발간

한상진(78)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중민재단 이사장)와 심영희(76) 한양대학교 법학과 명예교수 부부. 평생을 함께 사회학을 연구하며 우리 사회의 문제를 통찰하고 해법을 제시해온 저명한 두 학자는 4년 전 아내인 심 교수가 '기능성 이상운동증후군'이란 희소 질환을 앓기 시작하며 각각 간병과 투병이라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뚜렷한 원인도, 치료법도 없는 질병 앞에서 온 가족이 심 교수의 건강 회복과 재활에 매달려야 했고, 별다른 의학적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매일 집 주변을 걷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다시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중민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한 교수는 아시아경제 독자들을 향해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운동해야 한다. 걷는다는 건 모든 건강의 기초이고 핵심이니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는 병, 걷기로 극복

심 교수는 2019년부터 신체의 일부 근육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증상을 겪기 시작했다. 증세가 점차 심해져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가 되고 나서야 정확한 병명을 찾아 여러 대학병원을 돌아다녔다. 처음엔 파킨슨병을 의심해 뇌 자기공명혈관촬영(MRA), 척추 자기공명영상(MRI)과 같은 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소견뿐이었다.

여러 차례의 검사 끝에 의사가 내린 진단명은 기능성(심인성) 이상운동증후군. 근육에 비정상적이고 자발적이지 않은 움직임이나 떨림이 생겨 고통을 겪는 질병으로, 의학계에선 뇌에서 내보내는 신경신호 전달 방식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확한 발병 원인은 아직 밝혀진 게 없지만 스트레스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병이 발병하기 전까지 심 교수 역시 매일같이 이어지는 과중한 업무로 늦은 시간을 넘겨 새벽녘에야 잠들기 일쑤였다.

한 교수와 가족들은 심 교수의 치료를 위해 저명한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는 절망적인 대답을 들어야 했다. 항우울제나 신경안정제처럼 심리적인 안정과 휴식, 편안한 수면이 가능하게 하는 약만 처방받는 데 그쳤다.

증상이 더 악화하면서 심 교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가만히 있을 때도 떨리는 근육 탓에 땀으로 옷을 적셨고, 잠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심 교수의 증상 완화를 위해 한 교수가 택한 건 '걷기'였다. 가만히 있으면 근육이 굳어 병세가 더 나빠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집 밖을 나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남편과 아들, 간병인이 번갈아 가며 부축을 해가며 몇걸음 내딛는 게 다였지만, 점차 걸을 수 있게 되면서 아파트 단지로, 인근 산책로로 조금씩 거리를 늘려나갔다.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되고, 하루가 다르게 몸이 편안해지는 걸 느끼면서 심 교수 스스로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 교수는 "이 병을 앓는 환자들에게 이런 재활 훈련이 효과가 있는지 아직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로서는 몸소 체험을 통해 걷기의 효과에 확신을 갖게 됐다"며 "고장 나고 엉겼던 근육과 신경들이 (걷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풀어지고 선순환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지난해 봄, 한상진 교수와 심영희 교수 부부가 자택 인근 공원을 산책하고 있다.(사진= 한상진 교수 제공)

몸이 기억하는 걷기의 힘…위기에서 빠른 회복

2년 정도 지나자 아내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마비로 어색했던 몸의 움직임이 부쩍 자연스러워지고 경련도 줄어들었다. 걷기 운동을 마치면 한 교수는 매일 밤 아내의 발을 손수 씻기고 로션을 발라줬다. 매일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부 사이도 더욱 돈독해졌다. 주변 사람들은 남편인 한 교수의 사랑과 헌신, 자녀들의 극진한 병간호, 그리고 이에 보답하듯 심 교수의 강인한 투병 의지가 힘든 위기를 극복하고 기적을 이뤄냈다며 놀라워했다.

젊은 시절 한 교수는 일찌감치 걷기 운동의 중요성을 깨달은 바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 맡았던 2000년대 초반 격무에 시달리면서 운동량이 줄어든 탓에 체중이 급격히 불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기에 이르렀다.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느낀 순간부터 걷기 운동과 식이요법 등으로 관리에 나섰는데, 이때 체득한 걷기 습관이 지금까지의 건강 유지에 도움을 줬다는 게 본인의 증언이다.

심 교수의 건강이 차도를 보일 무렵 한 교수도 건강검진에서 이상 소견이 발견돼 조직검사를 하고 수혈까지 받는 고비를 겪었다. 마찬가지로 지난 한 해 꾸준히 걷기 운동을 하며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 교수는 "보이진 않지만 20년 넘도록 매일 걷고 운동을 하며 비축한 어떤 힘이 있었기에 회복도 좀 더 빠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부는 한겨울인 요즘도 걷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서울 서초구 자택이 위치한 아파트 단지 내 산책길부터 인근 신반포공원, 피천득길, 반포종합운동장 트랙 등을 매일 1만보 이상 걷는다. 위험한 코스나 무리한 운동은 피하고 상대적으로 평편한 산책길을 다소 빠른 속도로 걷는다.

한 교수는 "나이가 들더라도 끊임없이 운동해야 한다는 게 철칙"이라며 "위험한 운동은 피하되 몸에 필요한 운동을 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걷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분명 걷는 동안 엔도르핀이 솟아나고, 평소 머릿속에 있었지만 미처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오래된 기억이나 흥미로운 생각들이 탁탁 떠오르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며 "혈액과 신경 순환이 원활해지면서 뇌에 영향을 주는 효과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한상진 교수는 지난 3년간 아내의 투병 과정과 증상, 운동 효과, 함께 나눈 대화나 당시의 감정 등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손글씨로 메모해 두었다.(사진= 한상진 교수 제공)

고된 투병기 일일이 손으로 기록

평생을 학자로 살아왔기 때문일까? 한 교수는 아내의 투병 과정과 각종 증상, 재활 효과, 함께 나눈 대화나 당시의 모든 감정 등을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노트에 펜으로 눌러 적어놨다. 특별한 목적을 갖고 쓴 것은 아니었지만 후일 이 기록 덕분에 심 교수 역시 당시의 고통과 절망적이었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고, 부부는 지난 6월 투병기와 간병기를 정리한 '근육이 마구 떨리는데 마음의 병이라니!'라는 책을 함께 써냈다. 희소병의 투병기라는 흔치 않은 주제를 다룬 이 책은 미국에서도 번역본을 제안받아 출간을 앞두고 있다.

한 교수는 이처럼 글로 기록하고 필요한 자료나 정보를 잘 정리하는 일도 뇌 건강에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펜으로 글씨를 쓰거나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손과 뇌가 함께 움직이면서 자극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것"이라며 "이런 노력을 매일 한다면 뇌의 노화를 막고 치매도 예방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편집자주 - 아시아경제가 '2023 범국민 뇌건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하루만보하루천자'운동을 벌입니다. '하루만보하루천자'는 건강한 100세 시대, 날카로운 뇌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만보를 걷고 하루에 천자를 쓰자는 운동입니다. 이를 위해 '하루만보하루천자 뉴스레터' 구독자에게 걷기 좋은 코스, 쓰기 좋은 콘텐츠를 제공합니다. '하루만보하루천자' 운동은 나와 내 가족을 지키는 가장 돈이 들지 않는 현명한 운동입니다.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이명환 기자 lifehw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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