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호의 시시각각] 욕먹는 윤석열 외교 전략이 답이다
중국 배려는 현실 고려한 타협책
대중 의존도 줄이려면 시간 걸려
중용(中庸)의 정책은 늘 인기가 없다. 좌우 어디서 보든 화끈하지 않은 탓이다. 치우침 없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 독트린인 한국판 '인도·태평양 전략' 역시 보수·진보 모두에게 욕을 먹었다. 문제는 중국이었다. 지난달 28일 발표된 이 전략을 두고 한 보수 논객은 "국제 법규를 밥 먹듯이 어기는 중국이 한국의 위협임을 밝히기는커녕 전략적 파트너로 치켜세웠다"고 분개했다. 미국의 톤은 달랐다. 지난 2월 전략 보고서에서 "중국의 강압과 침략은 전 세계에 걸쳐 있으며 인·태 지역에서 가장 심하다"고 비난했다. 캐나다의 중국 공격도 노골적이었다.
반면에 진보 쪽은 중국을 겨냥한 인·태 전략에 한국이 왜 끼느냐고 공격한다.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한국은 최대 교역국인 중국을 적대시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같은 전략을 두고 보수는 중국을 제대로 못 때렸다고, 진보는 쓸데없이 적으로 삼는다고 불만이다.
그러나 양측이 비판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번 전략의 적절함에 대한 증거라고 필자는 본다. 종국적 지향점과 차디찬 현실을 두루 고려했기에 이런 균형 잡힌 전략이 나왔다고 믿는 까닭이다. 사실 이번 인·태 전략은 꽤 의외였다. 7차 북한 핵실험이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판에 무인기까지 휘젓고 다니는 요즘이다. 강철 같은 한·미 동맹이 절실한 때라 미국 편에 서서 일방적으로 중국을 때리는 독트린이 나올까 걱정이었다. 외교·안보 라인이 주로 미국통으로 채워진 터라 더욱 그랬다.
하지만 막상 나온 내용은 딴판이었다. 안보 측면이 강한 미 인·태 전략과는 달리 처음부터 이 지역의 경제적 중요성이 강조됐다. 이어 자유·평화·번영이란 비전이 언급된 뒤 중국을 배려한 것이 분명한 포용성이 다뤄졌다. 전체적으로 중국을 의식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느 정권 못지않게 한·미 관계를 중시하는 현 정부에서 어떻게 이런 뜨뜻미지근한 전략이 나올 수 있는가. 궁금한 끝에 여기저기 알아보니 안개가 걷혔다. 우선 한·미 관계를 홀대한 듯한 인상은 착각임을 한 미국 전문가의 글에서 깨달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전략의 이름이었다. '자유·평화·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이란 제목 자체가 윤 정부의 본심을 천명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전략적 모호성'이란 명분 아래 인·태 전략 참여를 꺼렸다. 반면에 윤 정부는 인·태 전략이란 이름의 독트린을 발표했으니 엄청난 변화다. 결국 필자는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셈이었다.
정부는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고 한다. 초안을 만든 뒤 관계부처 회람을 거쳐 2안, 3안을 가다듬었다. 또 미·일·캐나다·EU 등의 인·태 전략도 꼼꼼히 참조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드 배치를 이유로 여전히 한국 기업을 홀대하는 중국을 후련하게 비판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었나. 우선 현 정부는 국제관계, 특히 대북 문제와 관련된 중국의 중요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둘째, 한·중 경제 관계도 내칠 수 없는 대목이다. 당국은 전략 발표 전, 200여 개 주요 품목의 상호 의존도를 점검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당장 중국과의 관계를 끊기에는 한국 기업이 너무 취약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결국 대중 의존도를 줄이고 다변화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는 후문이다. 더불어 행간을 읽어 보면 중국에 대한 경고도 담겨 있다. '상호 존중'이 핵심 개념으로 중국이 법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한국도 가만있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외교의 전설로 통하는 헨리 키신저. 키신저는 외교의 최고 덕목으로 중용과 융통성을 꼽는다. 한쪽에 치우치고 경직된 외교정책에 집착하면 상황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충고다. 누군들 화끈한 걸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실리를 챙기기 위해 중용을 잃지 않고, 때론 미지근하게 보이는 전략을 내미는 것도 진정한 용기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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