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연아' 없을 뻔 했다…'과천 빙상장' 만든 한 공무원의 진심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14〉 김연아 금메달과 평창 유치전
그날 경기 중계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전에 경기도 과천시장을 지낸 김재영씨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김연아 금메달도 모르는 일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물론 금메달의 결정적인 요인은 김연아의 남다른 재능과 노력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 공무원의 숨은 노력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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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영 과천시장, 포기 않는 진심
“겨울 스포츠 인프라 열악” 호소
2014 겨울올림픽 유치 총력전
러시아 물량 공세에 아쉬운 패배
」
1991년 노태우 정부 때다. 나는 경제기획원 예산실에서 교육문화체육예산 담당관을 맡고 있었다. 어느 날 김재영 과천시장이 나를 찾아왔다. 뜻밖의 방문이었다. 그 전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김 시장은 과천 빙상장을 짓는 데 내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사연은 이랬다. 당시 과천시는 지상 4층, 지하 3층의 시민회관 건립을 추진 중이었다. 여기에 다양한 체육시설(수영장·볼링장·체육관 등)과 문화시설(대극장·소극장 등)을 넣기로 했다. 국제 규격의 빙상장(아이스링크)을 짓는 구상도 있었다.
그런데 내무부(현 행정안전부)에서 빙상장 건립을 반대했다. 우리나라 경제 수준에선 시기상조라는 이유였다. 김 시장이 아무리 설득해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경제기획원에서 적은 금액이라도 예산을 지원해 달라는 얘기였다. 국비 지원을 명분으로 내무부를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과천시장은 임명직이었다. 내무부 소속인 그가 예산을 쓰려면 내무부 허락을 받아야 했다.
“스포츠 인프라는 미래 위한 투자”
요즘 표현으로 하면 김 시장은 빙상장 건립에 진심이었다. 나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왔다. 김 시장의 설명은 이랬다. “겨울 스포츠 인프라가 너무 열악합니다.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건 국가의 의무입니다. 국제 규격 빙상장은 사치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당시 신규 사업은 예산실 내부 심의 회의를 통과해야 했다. 빙상장 안건을 그냥 올렸다간 눈 밝은 국·과장들이 지역 형평성을 들어 반대할 게 뻔했다. 나는 이렇게 설득했다. “빙상장과 함께 짓는 수영장은 과천청사 공무원도 과천시민처럼 쓸 수 있게 한답니다.” 이런 ‘당근’ 덕분일까, 김 시장의 진정성 덕분일까. 간신히 빙상장 지원안이 통과됐다.
우여곡절 끝에 과천시민회관이 문을 연 건 1995년 10월이었다. 경기도 군포에 살며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김연아가 과천 빙상장에서 스케이트를 배우기 시작한 때는 96년 여름이었다. 김연아의 어머니 박미희씨가 쓴 책(『아이의 재능에 꿈의 날개를 달아라』)에 나오는 이야기다. 만일 과천 빙상장이 없었거나 건립이 늦어졌다면 피겨 여왕의 인생길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현재 과천시민회관 빙상장에는 김연아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사진 밑에선 수많은 꿈나무가 스케이트를 배우고 있다. 처음 빙상장 건립을 계획한 91년은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8000달러도 안 되던 시절이다. 그 뒤 27년 만에 한국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겨울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가 됐다. 생각하면 할수록 김재영 시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에는 감탄이 나온다.
평창 지지 대가 요구했던 북한
김연아를 생각하면 두고두고 아쉬운 점도 있다. 2014년 강원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에 실패했던 일이다. 나는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올림픽 유치전에 앞장섰다. 하지만 석유 재벌을 앞세운 러시아의 전방위적 물량 공세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평창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면 김연아가 2회 연속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이해할 수 없는 판정으로 러시아 선수(아델리나 소트니코바)에게 뒤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2006년 7월 정책실장 임명장을 받았다. 여러 가지 중요한 임무가 있었지만 올림픽 유치도 그중 하나였다. 노 대통령도 힘을 실어줬다. 핵심 멤버 여덟 명을 모아 비공식 회의체를 구성했다. 내부적으로 ‘8인 회의’라고 불렀다. 참석자는 나와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 김진선 강원지사, 한승수 평창올림픽 유치위원장, 김정길 대한체육회장, 오지철 청와대 정책특보였다.
청와대 서별관에서 정기적으로 8인 회의를 열고 상황을 점검했다. 나는 회의에서 제기된 애로사항을 관계 기관에 연락해 해결해주는 역할을 주로 했다. 박용성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의 사면복권을 노 대통령에 건의한 것도 그런 차원이었다. 삼성을 비롯한 민간 기업과 협력체계를 만드는 일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2014년 겨울올림픽 유치를 신청한 도시는 세 곳이었다. 초기에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가 앞서나갔다. 그런데 2007년 1월 잘츠부르크 유치위원장이 내분으로 사퇴하면서 최하위로 밀렸다. 결국 평창과 소치의 대결로 좁혀졌다.
이 무렵 IOC 위원인 이건희 삼성 회장과 8인 회의 참석자들이 서울 신라호텔에서 저녁 모임을 했다. 나는 이 회장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2003년 IOC 총회에서 세 표차로 졌지만 평창이 선전했던 건 삼성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이 회장께서 해외도 자주 나가시고 각국 IOC 위원들을 직접 만나주십시오.” 노 대통령도 2006년 12월 청와대 행사에 참석한 이 회장에게 삼성의 협조와 지원을 각별히 당부했다.
북한과의 관계도 쉽지 않은 부분이었다. 북한의 공식 입장은 평창올림픽 지지였다. 문재덕 조선체육지도위원장이 자크 로게 IOC 위원장에게 지지 서한도 보냈다. 겉으로 드러난 게 전부가 아니었다. 북한은 대가를 요구했다. 한 대기업에 혹시 방법이 있겠냐고 물어봤다. 그쪽에서 영수증을 요구하기에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2007년 7월 과테말라시티에서 열린 IOC 총회였다. 노 대통령은 현장에 가는 걸 망설였다. 2003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IOC 총회에는 노 대통령이 안 갔다. 대신 고건 총리가 평창 유치단을 이끌었다.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은 중앙일보에 이런 회고를 남겼다. 2003년 그는 청와대에 들어가 노 대통령에게 IOC 총회에 가지 말라고 권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준비상황이 안 좋고 유치 가능성이 작다. 대통령이 와서도 실패하면 정치적으로 부담이 될 것”이란 이유였다. 중앙일보 2009년 1월 6일자 29면)
“올림픽 유치가 실제 도움이 됩니까”
청와대 참모들은 노 대통령에게 과테말라 총회 참석을 건의했다. “러시아에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갑니다. 우리도 대통령이 직접 가지 않으면 여론이 나빠질 수 있습니다.” 여론 때문에 할 수 없이 가야 한다는 건 노 대통령을 설득하기에 좋은 이유가 아니었다.
노 대통령은 몇 번이나 물었다. “올림픽 유치가 실제로 도움이 됩니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올림픽의 경제적 효과가 얼마라는 건 사실 과장된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올림픽 유치로 도움을 받는 부분도 매우 많습니다. 대통령이 현장에서 IOC 위원을 한 명이라도 더 만나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산업적 측면에서 올림픽의 기대 효과도 설명했다. “여름 스포츠보다 겨울 스포츠는 첨단 장비가 훨씬 중요합니다. 현재 아시아에서 이걸 할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 수입 장비에만 의존하겠습니까. 스포츠 장비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올림픽이 좋은 계기가 될 겁니다.”
2007년 7월 1일 미국 시애틀을 경유해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노 대통령은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많은 IOC 관계자들을 만났다. 밤늦게까지 쉴 틈이 없었다. 나는 러시아가 주최한 파티장에도 가봤다. 푸틴 대통령이 여러 사람과 귓속말을 하며 돌아다니는 모습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현지시간으로 4일 오후 투표가 진행됐다. 1차 투표에선 평창이 1위(36표), 소치가 2위(34표)를 했다. 2차 결선투표에선 평창(47표)이 소치(51표)에 네 표차로 졌다.
며칠 뒤 미국 하와이를 거쳐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있던 일이다. 푸틴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왔다. 나하고 같이 앉아있던 노 대통령은 혼잣말을 했다. “아, 정말 받기 싫은데.” 차마 러시아 대통령의 전화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노 대통령이 마지못해 일어나 전화기 있는 쪽으로 가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결국 평창은 삼수 끝에 겨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2011년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다. 그 후 TV에서 평창올림픽 중계 장면을 봤다. 김연아는 현역 선수는 아니었지만 성화 최종주자로 개막식 무대에 올랐다. 나는 김연아의 모습을 보며 감회가 깊었다. 국가가 생활체육 인프라를 마련해 어릴 때부터 지원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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