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아트&디자인] 박민준, 캔버스 위의 환상 무대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 지하 1층. 계단을 내려가면 마치 연극 공연장처럼 어두운 공간이 펼쳐집니다. 벽 한쪽엔 무대 위 배우처럼 조명받은 액자 속 인물 9명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토끼, 여우, 고양이 등 동물 가면을 쓴 배우들의 초상화입니다. 그 앞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금방이라도 그들의 대사와 함께 연극이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오래된 유럽 미술관에서나 봤음직한 고전회화처럼 그려진 이 그림들은 박민준(51) 화가의 ‘콤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 연작입니다. 2018년 ‘라포르 서커스’란 제목으로 장편소설과 함께 회화와 조각을 발표했던 그가 이번엔 ‘두 개의 깃발’과 ‘X’, ‘콤메디아 델라르테’ 등 새 연작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박민준은 직접 소설을 쓰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입니다. 과거 ‘라포르 서커스’가 곡예사 라푸와 별난 서커스 단원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이번 전시는 그의 새 소설 『두 개의 깃발』(2020)과 함께 다시 한번 환상의 세계를 유영합니다. 최근엔 소설 『라포르 서커스』의 영문판까지 낸 걸 보면 이 화가가 자신이 캔버스에 펼쳐놓는 이야기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환상적인 풍경에 감탄합니다. 이야기를 모르면 어떻습니까. 서구 고전회화에 영향을 받은 정밀한 묘사와 우아한 색감, 뚜렷한 명암 대비로 표현된 캔버스가 마법 같은 세계로 우리를 이끕니다.
2018년 만났을 때, 그는 이런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홍익대 대학원 시절,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 ‘의심하는 도마’를 보고 매료돼 일본에서 1년간 고전회화 기법도 공부했다”고 말했습니다. 극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던 그가 극적으로 표현된 빛과 색감, 한 장면으로도 보는 이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작업 방향을 튼 것입니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낯선 캐릭터와 초현실 같은 장면이 가득한 그의 캔버스엔 삶과 죽음, 꿈과 이상, 불안과 용기, 기억과 행복, 도전과 실패 등 우리가 살며 겪는 상황과 다양한 감정이 배어 있습니다. 우아하면서도 우스꽝스럽고,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기도 한 장면들, 화가 박민준이 바라본 인간 삶의 풍경입니다.
21세기에 고전 기법으로 작업하며 자기 세계를 구축해가는 일이 어디 쉽기만 하겠습니까.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가 소설과 캔버스 안에서 어려운 도전에 몸을 던진 것처럼 화가는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하며 모험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더 폭넓은 관객과의 교감입니다. 국내에 마니아 컬렉터들을 확보한 그가 앞으로 세계로 어떻게 뻗어갈지 주목됩니다. 새해를 맞은 우리 마음처럼, “균형을 잘 잡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한 화가의 뜻이 잘 이뤄지길 바랍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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