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자의 V토크] 흥국생명이 원하는 방향은 승리가 아니었나
흥국생명이 2일 권순찬 감독과 결별했다. 권 감독 스스로 사의를 밝히진 않았다. 팀은 1위와 승점 3점 차 2위였다. 권 감독은 마지막으로 지휘한 경기가 끝난 뒤 "1위에 대한 욕심이 있다"고 했다. 자진사퇴는 아니다.
흥국생명은 이례적으로 보도자료에서 구단주가 직접 이유를 밝혔다. 흥국생명 대표이사인 임형준 구단주는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권순찬 감독과 헤어지기로 결정했다. 단장도 동반 사퇴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배구계 관계자는 "권순찬 감독이 선수 기용과 관련해 구단 고위층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고 전했다. 구단이 기용하길 바랐던 선수들은 대체로 연차가 낮은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권 감독은 올 시즌을 베테랑 위주로 꾸렸다. 베스트7 중 김연경, 김나희, 김미연, 김해란이 30대다. 주전 김다솔(27)도 세터 중 가장 나이가 많다.
권 감독이 이 선수들을 중용한 이유는 명확하다. 이기기 위해서다. 2년 만에 흥국생명으로 돌아온 김연경은 권 감독과 자주 대화를 나눴다. 가장 많이 나눈 이야기는 "우승하고 싶다"였다. 유럽 진출 과정과 복귀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복잡했음에도 김연경이 핑크색 유니폼을 입은 건 "국내 팬들 앞에서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열망 하나였다.
불과 1년 전 흥국생명은 '약팀'이었다. 신생팀 페퍼저축은행을 제외하면 꼴찌였다. 외국인선수 캣벨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권 감독은 패배의식이 쌓인 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김연경을 중심으로 선수단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지난해 8월 열린 컵대회 당시 흥국생명은 젊은 선수들 위주로 대회를 치를 예정이었다. 특히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하던 멤버들에게 많은 출전시간을 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코로나19 감염으로 8명의 선수만 남았고, 베테랑 선수들이 교체 없이 조별리그를 치러 준결승에 올랐다.
권 감독은 준결승에서 김연경, 김해란을 비롯한 고참 선수들을 뺐다. 자가격리가 끝난 선수들 위주로 경기를 했고, 도로공사에게 패했다. 권 감독이 그런 선택을 내린 건 선수들을 위해서였다. 권 감독은 "(준결승에 나선)선수들에게 약속을 했다. 그 친구들이 여름에 정말 열심히 했다. 이기고 싶지만, 선수들이 먼저"라고 설명했다. 선수들은 사령탑의 진심을 이해했고, 공정한 경쟁이 이뤄진다는 공감대를 이뤘다.
일부 팬들은 권 감독의 전술 운용에 대해 지적했다. '낮고 빠른 배구'를 하려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거다. 선수 교체 타이밍에 대한 지적도 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여자 팀을 처음 맡는 권순찬 감독도 어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권순찬 감독은 스스로 변화했다. 다소 실험적이지만 상대에 따른 로테이션 변화를 줬다. 3라운드 막판엔 세터 이원정을 트레이드로 데려왔다. 어떻게든 공격수들을 최대한 활용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3라운드 최종전에선 선두 현대건설도 이겼다. 개막 전 미디어데이에서 "어렵지만 최선을 다해보겠다"던 김연경도 "우승에 대한 욕심이 난다"고 했다.
흥국생명 선수단은 가벼운 마음으로 짧은 휴가를 마치고 숙소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날, 권 감독 해임 소식을 들었다. 이날 저녁 선수단 회식이 있었고, 김연경은 권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연경은 "고문이 빠지면 되느냐"고 했지만, 권 감독은 갈 수 없었다.
일부 선수들 사이에선 보이콧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권 감독은 선수들이 끝까지 경기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랐다. 권 감독과 함께 물러나려 했던 이영수 수석코치가 대행을 맡게 된 것도 권 감독의 부탁 때문이었다. 남은 선수와 코치도, 떠난 감독도 '승리'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흥국생명 구단이 바라는 '방향'은 승리가 아닌 듯하다. 시즌 중 감독과 결별로 선수들에게 악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방향'이 무엇인지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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