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제 진화, 예방백신 진전… ‘에이즈’ 정복 속도낸다
후천성면역결핍증, 즉 에이즈(AIDS)는 1990년대 중반까지 거의 모든 환자 목숨을 앗아가며 ‘천형’으로 불렸다. 하지만 에이즈의 원인인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효율적으로 억제하는 치료제의 눈부신 발전으로 HIV 감염인의 기대수명이 길어지면서 이제 만성 감염병으로 관리되는 추세다. 최근 예방 백신 개발에도 진전을 이루면서 에이즈 정복을 향한 인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HIV 감염인은 몸 속에 HIV를 갖고있는 사람을 총칭한다. 반면 에이즈 환자는 HIV 감염 후 면역체계 손상이 심해지면서 일정한 면역수치 이하이거나 결핵, 곰팡이폐렴 등 각종 감염성 질환 증상이 나타난 경우를 말한다.
HIV 치료사를 획기적으로 바꾼 항바이러스제의 1차 목표는 감염인이 에이즈 환자로 이어지지 않게 하고 사망률을 줄이는 것이었다. 초창기에는 여러 항바이러스 기전의 약제를 섞어 강력한 효과를 내는 소위 ‘칵테일 요법’이 주였다. 식사와 함께 매일 3회, 하루 최대 22개의 알약을 먹어야 해 위장장애를 겪는 등 감염인의 부담이 컸다. 이후 바이러스 억제 효과는 유지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약 복용 부담을 줄이고 감염인의 복약 순응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다. 현재는 2~3가지 다른 계열의 항바이러스 성분을 한 알에 넣어 하루 한 번 복용만으로 바이러스 억제가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고려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는 2일 “HIV는 감염 초기 항바이러스제 투여가 매우 중요하다. 하루 한 알씩 거의 빼먹지 않고 먹어서 복약 순응도 95% 이상 유지하면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으며 성생활을 해도 전염력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부분 복약 지침을 잘 따르지만 드물게 우울증·알코올의존증이 있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 약 복용을 안 하거나 3~6개월에 한 번씩 있는 진료를 받지 않기도 해 이들의 복약 순응도를 높이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최근에는 1~2개월마다 한 번 투여하는 장기 지속형 주사제도 개발돼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미국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NIAID)는 장기간 효과 있는 약물 개발을 HIV 치료 연구의 미래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연구소는 “매일 약을 복용하는 것이 어려운 HIV 감염인들에게 복약 편의성을 높이고 독성이 덜하거나 비용 효과적일 수 있다”고 밝혔다. 장기 지속형 주사제는 지난해 초 국내 승인을 받았지만 아직 출시는 안된 상태다.
이 같은 항바이러스제의 진화로 2008~2010년 HIV 치료를 처음 시작한 20세 감염인의 기대수명은 78세에 달한다(2017년 의학학술지 랜싯).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1년 신규 HIV 감염인(975명) 중 20대(36.1%)와 30대(30.1%)가 상당수를 차지했는데, 기대수명(2021년 기준 83.6세)을 고려하면 이들은 50년 이상 HIV 치료를 받아야 한다.
HIV 감염인이 치료에 고려할 사항이 이전과 달라지고 있다. HIV 억제가 1차 목표인 것은 변함 없지만 고령화되는 감염인의 장기적인 건강관리와 삶의 질도 함께 감안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2016년 경북대병원 감염내과 김신우 교수가 대한내과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HIV 감염인에서 심혈관계질환, 지방이영양증, 당뇨병, 골질환, 콩팥질환 등이 자주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연구에 의하면 HIV 감염인의 이런 비(非)감염성 질환은 2010년 29%에서 2030년 84%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또 HIV 감염인의 에이즈 연관 사망은 줄어드는 반면, 비에이즈 질환으로 인한 사망은 증가하는 것으로 관찰됐다. 질병청에 따르면 2016~2021년 HIV 감염인의 연평균 사망자는 135명이다. 다만 사망이 HIV 감염이나 에이즈에 의한 것인지,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자연적인 노화와 감염인 개인의 생활습관에 더해 바이러스도 비에이즈 질환 발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HIV 치료제가 가진 독성 영향도 있다. 항바이러스 성분은 심혈관계질환, 콩팥기능, 골감소 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고돼 있다. HIV 감염인에서 동반질환이 발생하면 항바이러스제와 동반 질병 치료약을 함께 복용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 경우 약물 간 충돌이 발생할 우려도 있어 합병증 치료를 위해 기존 HIV 치료제의 변경이나 중단을 고려해야 한다. 최근 열린 대한에이즈학회 학술대회에선 유관 학회들과 협업해 HIV 감염인의 비에이즈 만성질환 진료지침을 만들어 보급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HIV 예방 백신 개발에도 가속도가 붙고 있다. 지난해 말 미국 국립보건원(NIH) 등 공동 연구팀은 자체 개발 중인 HIV 백신이 초기(1상) 임상시험에서 약 97%의 면역반응 효과를 얻었다고 과학학술지 사이언스를 통해 발표했다. 연구팀은 해당 백신 접종으로 체내에서 HIV를 광범위하게 중화시키는 항체 전구체를 유도할 수 있다며 상용화에 도달하면 HIV 연구 40여년(에이즈 첫 발견 1981년) 만에 성공한 최초의 백신이 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 모더나사도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이용된 mRNA 플랫폼 기반의 HIV 백신 후보물질에 대한 임상1상 시험을 아프리카 국가에서 진행중이다.
하지만 이들 HIV 백신은 초기 개발단계로 실용화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김우주 교수는 “임상1상은 백신의 안전성을 확인하고 일부 면역효과를 관찰하는 수준이며 향후 2·3상 등 대규모 환자 대상 위약(가짜약)비교 연구에서 효과가 입증돼야 상용화를 언급할 수 있다”면서 “그간에도 1상임상에서 효과를 보인 연구는 많았던 터라 섣부른 기대는 이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항바이러스제의 진화로 HIV와 에이즈가 만성 감염병으로 관리 가능해졌지만 혁신적 돌파구(Breakthrough) 기술이 나오지 않으면 백신 개발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예방 백신이 아직 없는 상황에서 현재 치료제로 쓰이는 일부 항바이러스제를 (성접촉 등을 통해) 감염 위험이 높은 사람에게 지속 투여해 HIV 감염과 전파를 미리 차단하는 대응전략(PrEP·노출 전 예방요법)의 확산이 현실적 대안이라는 의견도 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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