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성적이면 당연히 의·치대"... 수학덕후 괴롭히는 '집요한 조언' [아이들은 나의 스승]
[서부원 기자]
▲ 교실 풍경(자료사진). |
ⓒ 픽사베이 |
교사인 내게 2022년 죽비가 돼준, 여기 고1 두 제자가 있다. 호기심이 많고 자신의 꿈이 확고하며, 친구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지식과 시간을 할애할 줄 아는 고마운 아이들이다. 교사들에겐 물론, 반 친구들 사이에서도 단연 첫손에 꼽히는 모범생들이다.
둘은 수업이 끝나면 늘 질문거리를 갖고 교무실을 찾아온다. 예습한 내용과 다르다며 교과서의 서술을 지적하기도 하고, 수업 중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며 꼬치꼬치 캐묻곤 한다. 그러곤 자신이 새로이 알게 된 내용을 친구들에게 일부러 찾아가 조곤조곤 설명해준다.
학교의 아이들이 그 둘만 같다면, 걱정거리가 뭐 있을까 싶다. 고민은커녕 교사로서 가르치는 보람이 넘치고 하루하루가 선물처럼 느껴질 것 같다. 가끔은 두 학생의 질문에 답변하는 게 즐겁고, 그들과의 대화가 나를 한 뼘 더 성장시키는 느낌이 들어 뿌듯하기까지 하다.
두 아이 중 지현(이하 모두 가명)이는 자타가 인정하는 '인문학도'다. 내로라하는 독서광으로, 역사와 시사 상식에 두루 해박하다. 교육과정에도 없는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를 독학으로 공부하고, 유수의 해외 언론 사이트를 검색하는가 하면, 대학의 학위 논문까지도 너끈히 읽어낸다.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그에게 동화책쯤에 불과하다. 지나치게 소략해 그의 호기심과 탐구욕을 충족시켜주지 못해서다. 질문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고 그에게 수업을 맞출 수도 없다. 그랬다간 다른 아이들이 죄다 책상 위에 쓰러지게 될 것이다.
겨울방학을 한 주 앞둔 며칠 전 그가 부탁이 있다며 찾아왔다. 기말시험도 끝나 진도에 대한 부담이 없을 테니, 수업 시간을 자신에게 내어 달라는 거다. 자기가 또래 친구들 앞에서 수업을 진행하겠다는, 사뭇 당돌한 요구였다. 스스로 '지현이의 현대사 특강'으로 이름 지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그의 가슴을 때린 건, 6.25 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관련 대목이었다. 분명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할 사건인데도 교과서에 한두 줄로 눙치고 넘어가는 게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나마 사건 이름이라도 기재된 게 불과 몇 해 전이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 지현(가명)이가 6.25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수업하고 있는 모습.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참혹한 학살의 현장을 보여주는 사진이 띄워져 있다. |
ⓒ 서부원 |
그는 노근리 사건은커녕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조차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해방 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사건 중 아는 거라곤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뿐이라고 말했다. 개정 전 교과서에서도 이 두 사건은 '남한 사회의 혼란'이라는 제목으로 몇 줄 언급됐었다.
그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화면에는 학살당한 주검들이 널브러진 흑백 사진으로 가득했다. 이야말로 전쟁의 본질이라며, 발생한 날짜와 지역명, 또 이름만 봐서는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단체를 끌어와 사건을 명명하는 건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 이름 뒤에 민간인 학살 사건임을 명토 박아야 한다는 거다.
그는 이번 특강이 '맛보기'일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앞으로도 교과서가 간과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제대로 공부한 뒤, 늘 그래왔듯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이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학살당한 사건을 고작 한두 줄로 끝낸다는 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그가 따로 만들어온 자료에는 개봉한 지 30년 가까이 지난 영화 <태백산맥>의 장면들까지 삽입돼 있었다.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이유에 대한 친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고 했다. 남과 북이 서로 보복 양상으로 치닫고, 친일 부역자들이 자신들의 죄과를 세탁하기 위해 가세하면서 학살이 더욱 만연됐다는 추론까지 내놓는 모습에서 학자적 면모가 물씬 풍겼다.
한편, 강준(가명)이는 수학을 진정 '사랑하는' 아이다. 수학을 잘한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와 견줄 만큼 수학 성적이 높은 친구야 여럿이지만, 그만큼 수학에 '진심'인 아이는 교직 생활 25년 동안 만나질 못했다. 수학을 공부할 때는 배고픔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말 그대로 '괴물'이다.
그의 꿈은 수학 교사다. 수학을 싫어하고, 일찌감치 수학 공부를 포기하는 아이들에게 수학이 얼마나 재미있는 학문인지 교사가 되어 보여주겠다며 벼르고 있다. 가르치고 설득하는 게 너무 행복하다면서,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곁눈질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강준이의 비유... 한국의 수학 공부=징병제
강준이는 만에 하나 임용시험을 통과하지 못해도 결단코 수학 교육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학교 교사면 어떻고 학원 강사면 어떻냐는 거다. 수학의 재미만 일깨워줄 수 있다면, 일하는 곳이 어디이고 수입이 얼마든 괘념치 않겠다고 잘라 말하는 천생 '수학의 덕후'다.
얼마 전 그도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빌려 친구들 앞에서 한 시간짜리 '특강'을 진행했다. 전 세계 여러 나라 청소년들의 수학 선호도를 비교하며, 우리나라 수학 교육의 현실을 초중고 학교급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수학을 싫어하면서도 성적은 상위권인 통계를 문제 삼은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수학 공부를 징병제에 비유했다.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병역 의무를 이행하듯 공부한다는 뜻이다. 대학입시가 끝나면 가장 먼저 폐지함에 버려지는 게 수학 문제집이라면서, 일단 제대하고 나면 군대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심리와 비슷하다는 거다.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게 수학인데, 학생들은 눈앞의 시험 성적에 대한 불안 탓에 어려서부터 찬찬히 생각하고 따져볼 여유를 잃어버렸다고 분석했다. '교육은 기다림'이라는 금언은 수학 교육에 꼭 들어맞는 말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하물며 등급을 나누고 줄 세우는 시험은 수학 교육을 망치는 주범이라고 연신 강조했다.
놀랍게도 그는 수학만 잘하는 게 아니다. 다른 과목들조차 압도적이라 할 만큼 성적이 우수하다. 학년말 내신 등급을 보니, 숫자 '2'가 드물 정도다. 다만, 국어와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건 수학 관련 논문을 읽기 위해서고, 사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다양한 사회 현상을 수학적 도구를 써서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라고 했다.
▲ 지현(가명)이와 친구들이 학교 현관 벽면에 꾸며놓은 북한 바로알기 프로젝트 전시물 모습. 그는 북한에 대한 관심도 유별나다. |
ⓒ 서부원 |
그런데, 학교 안팎에서 그들을 가만 놔두질 않는다. 우리 교육은 '인문학도' 지현이와 '수학 덕후' 강준이를 격려하고 응원하기는커녕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꿈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다. 지금껏 지현이가 가장 자주 듣는 말이 "인문학은 배고픈 학문"이라는 거고, 강준이는 "그 성적이면 당연히 의·치대"라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고 했다.
최근 지현이는 설상가상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진학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작년부터 이과생들의 소위 '문과 침공'이 보편화하면서, 그들과의 표준점수 경쟁에서 밀리게 될까 걱정하고 있다는 거다. 그는 스스로 문과가 '본캐(본캐릭터)'라면서도, 현재 이과로의 전향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일단 수능은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현행 문이과 통합 수능 체제에서는 문과 과목을 이수한 뒤 이과 관련 학과로 진학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문과 침공'에서 보듯 이과에서 문과로 옮기는 건 아무런 제약이 없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려고 해도, 당장 수능 고득점을 위해 이과 과목을 공부해야만 하는 현실이 서글플 따름이라고 했다.
강준이도 걱정이다. 남들에겐 언뜻 '행복한 고민'처럼 느껴질 수 있을 테지만, 그에겐 적잖은 스트레스다. 주변 어른들은 '나이 마흔만 돼도 후회하게 될 것'이라며, 수학 교사가 되겠다는 그의 꿈을 철딱서니 없는 고집으로 폄훼하기 일쑤다. 중년 즈음 의사와 교사의 사회적 대우와 삶의 질을 비교해보라며 대놓고 겁을 주기도 한다.
아직 강준이의 생각은 확고하다. 의치대 말만 나오면, 도중에 말을 끊고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며 무질러버린다. 심지어 수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살 수 있다면, 가난조차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되레 의사와 교사의 사회적 대우와 삶의 질이 천양지차라면, 그 구조를 바꾸도록 애쓰는 게 먼저 아니냐고 반문한다.
과연 강준이의 '고집'이 고3 때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어른들의 '집요한 조언'이 낡은 레코드판처럼 계속되고 있어서다. 그의 대쪽 같은 성정으로 미루어 쉽사리 바뀔 것 같진 않지만, 지현이가 이과로의 전향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그의 마음도 흔들릴 때가 올 수도 있다.
설령 지현이와 강준이가 '변심'을 한다 해도, 그들의 판단과 선택을 존중하고 신뢰한다. 그들의 꿈이 꺾인다면, 그 책임은 그들이 아니라 돈이 전부인 부박한 우리 사회와 거기에 부화뇌동한 교육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마음속으로 지현이와 강준이의 건투를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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