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앞에 힘 있는 자만..." 대통령 만난 이정미의 신년인사
[이경태 기자]
▲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년 신년인사회'에서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다. 2023.1.2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
ⓒ 연합뉴스 |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2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년 신년인사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법 앞에 힘 있는 사람만이 우선되는 사회가 아니라,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며 나아가 약한 자들을 먼저 지켜주는 '법의 정의'가 우선하는 시대를 열어달라 부탁드렸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오전 본인 페이스북을 통해 "오래 고민했지만 대통령을 만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다. 오늘 대통령께 그 말씀을 꾹꾹 눌러쓴 자필 편지와 얼마 전 타계하신 고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한 권을 선물했다"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 대표는 이날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야당 대표 중 유일하게 참석했다.
이 대표는 자필 편지 내용도 함께 공개했다. 그는 편지를 통해 "작년 3월 대통령께서 당선된 후, 대통령과 함께하는 첫 자리가 해를 넘긴 신년회가 될 줄은 몰랐다"면서 윤 대통령에게 통합과 협치 그리고 이를 위한 적극적 소통을 당부했다.
또한, 주52시간제 개편 및 '문재인 케어' 폐지 등을 거론하면서 "부유한 내 나라의 정부가 '밥을 먹여주지'는 못할지언정, 있는 밥그릇도 발로 차는 정부로 여겨지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이다"고 비판하고,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시민의 삶을 지키는 공적 '약속'이 우선"이라며 안전운임제 3년 연장 약속 등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
특히 "10.29 이태원참사에 시민들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행정 관료들의 무책임"이라며 "국가 최고 지도자의 시선이 시민의 안전과 삶을 향하고 있는지, 한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 중 특정 집단의 이익만 향하고 있는지, 지금 우리 시민들이 의심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다음은 이 대표가 이날 윤 대통령에게 전한 편지 전문이다.
▲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년 신년인사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전달한 자필 편지와 고 조세희 작가의 책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본인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
ⓒ 정의당 제공 |
윤석열 대통령께
정의당 대표 이정미입니다.
작년 3월 대통령께서 당선된 후, 대통령과 함께하는 첫 자리가 해를 넘긴 신년회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취임 9개월이 넘도록 야당 대표들과 자리하지 않는 대통령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번쯤은 얼굴 맞대고 국민들을 위한 정치,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할 공동의 목표를 논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기에, 그 마음을 편지로나마 전합니다.
민주적 제도를 통해 선출된 국가수반에게, 통합과 협치 그리고 이를 위한 적극적 소통은 가장 중요한 소임일 것입니다. 그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새해에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행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새해 덕담을 나누는 시민들의 마음 깊은 곳에 거대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마다 힘을 합쳐 헤쳐 나왔던, 우리 현명한 시민들은 느끼고 있습니다. 물가가 오르고, 부동산 버블이 꺼지고, 장기간 저성장이 지속될 것이라는 위기, 그 이상의 위기가 올 것이라는 불안입니다.
바로 '국가의 퇴행'이라는 역사적 위기입니다. 때로 주춤할 수도 있고 때로는 더디더라도 더 나은 복지국가로의 지속적인 진전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소망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룬 눈부신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부는 다수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시민 모두가 열심히 일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주 69시간 장시간 노동 체제, '건강보험 보장 강화 정책'의 폐지 등 대통령께서 직접 지시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조치들은 이 땅의 가난한 서민들과 일하는 시민들을 정부에 적대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부유한 내 나라의 정부가 '밥을 먹여주지'는 못할지언정, 있는 밥그릇도 발로 차는 정부로 여겨지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입니다.
선거에서 대통령께 표를 던지지 않았던 이들이라 해도, 대통령의 성공을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의 성공이고 모두의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최고 지도자들은 그 정치적 성향은 다르다 해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시민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10.29 이태원참사에 시민들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행정 관료들의 무책임입니다. 그들의 무책임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관료 조직은 높은 사람이 어디를 쳐다보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움직입니다. 국가 최고 지도자의 시선이 시민의 안전과 삶을 향하고 있는지, 한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 중 특정 집단의 이익만 향하고 있는지, 지금 우리 시민들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타계하신 조세희 선생님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다시 꺼내 읽습니다. 대통령께서도 한번쯤은 읽어보셨겠지만, 그 책에는 1970년대의 가난한 철거민 가족이 나옵니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철거 계고장 앞에 동생이 분노하자 형이 말합니다. "그만둬. 그들 옆엔 법이 있다."
대통령께서는 법치주의가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법치주의는 법 자체가 정당하기에 지키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은 도구입니다. 공동체가 시민의 삶을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에, 시민들은 법을 지키기로 모두 약속한 것입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시민의 삶을 지키는 공적 '약속'이 우선입니다.
지난 화물연대의 파업을 불법이라 탄압하기 전에 정부가 안전운임제 약속을 먼저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법치주의 국가다운 면모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손을 잡고 만든 '노동조합'을 부패하고 폭력적인 집단으로 몰아가는 일련의 조치들은 일하는 시민들에게서 멀어진 법, 나에게서 멀어진 법, 다시 한 번 '그들' 곁에만 있는 법이라는 탄식과 절망을 낳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님, 다가오는 경제 한파에 '그들'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시민들이 생각하게 되는 나라는 '공화국'이 아닙니다. 시민들과 정부가 더 멀어지기 전에 가속 페달만 밟고 있는 정부 정책에 잠시 브레이크를 잡고, 이 정부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경청하고 토론해 주십시오. 세계 전체가 마주한 거대한 전환기에 우리 시민들이 '공안검찰 반대'와 같은 구시대적 구호를 외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윤석열 정부의 5년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5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적인 시스템을 통해 유례없는 위기를 더 나은 기회로 만드는 대응책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길을 모색하는 데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학습한 우리 현명한 시민들과 함께, 저와 정의당이 함께 하겠습니다.
새해, 대통령께 조세희 선생님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한권을 선물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 "그들 옆엔 법이 있다"는 허무한 탄식이 아니라, '우리 시민의 고통에 공감하고 책임질 줄 아는 대통령이었다'고 기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법이 힘 있는 사람 편에서만 작동되는 '법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며 나아가 약한 자들을 먼저 지켜주는 '법의 정의'가 우선하는 시대를 열어 주십시오.
2023년 새해, 대통령님과 가족분들의 안녕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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