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이재명 대표를 너무 믿는 여당
보수 세력에 2004년 봄은 잔인했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의결(3월 12일)을 밀어붙였다가 되치기를 당했다. 대선 자금 차떼기 오명에 탄핵 역풍까지 뒤집어썼다. 당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민심은 여당인 열린우리당으로 몰렸다. 탄핵 당일 실시된 중앙일보 여론조사에서 열린우리당은 34%, 한나라당은 10%였다. 4월 15일 총선은 해보나 마나였다. 여당이 200석 넘게 싹쓸이하리란 전망이 쏟아졌다.
'야당 폭망' 분위기에서 한나라당 임시 전대가 열렸다. 총선 불과 23일 전이었다. 탄핵 정국에서 사퇴한 최병렬 대표 후임으로 박근혜 대표가 선출됐다. 그의 일성은 "천막당사로 출근하겠다"였다. '선거의 여왕'이 지휘를 시작한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결국 121석을 건졌다. 열린우리당에 과반(152석)을 내주긴 했지만, 사실 기적과도 같은 '졌잘싸'였다. 구원투수 박근혜를 탄생시킨 이 전대에 처음 도입된 제도가 바로 국민 여론조사였다. 1차 투표에서 대의원 50% 외에 여론조사 50%가 반영됐다. 대의원만이라면 홍사덕 의원의 선전이 예상됐다. 하지만 여론에서 압도적이던 박 대표가 1차 투표에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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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궤멸 위기 때 도입한 여론조사
당원100% 변경 뒤 낯뜨거운 모습
무서운 민심 언제 심판할지 몰라
」
여론조사 도입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었다. 절벽 끝에 섰던 보수 진영의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한나라당은 2002년 '노풍'(노무현 바람)의 진원지였던 국민참여 경선 앞에 무기력했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드라마도 여론조사가 썼다.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예선전의 열기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반면에 한나라당은 이회창 독주의 그림자가 짙고 길었다. "경로당" "수구꼴통" "그들만의 리그"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다양성 확대와 체질 개선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박근혜 대표 탄생 전 최병렬-서청원이 격돌했던 2003년 6월 전대에서 그 몸부림이 시작됐다. 컴퓨터가 무작위 추출한 국민 11만여 명이 선거인단에 포함됐다. 선거인단 규모는 정당 사상 최대인 23만 명이었다. 이후 한 단계 더 나아간 여론조사가 도입됐고, 총선 뒤 박근혜가 재신임된 2004년 7월 전대엔 온라인 투표 20%까지 더해졌다. 40세의 원희룡 현 국토교통부 장관이 2위로 돌풍을 일으키며 지도부에 입성했다. 이런 변신은 보수 기사회생의 발판이 됐다. 3년 뒤인 2007년 정권 탈환과 10년 집권의 토대였다.
이런 여론조사가 단칼에 국민의힘 대표 경선 방식에서 잘려나갔다. 3월 8일 치러지는 경선은 100% 당원 투표다. 당원 수가 늘어나서, 지역·연령별 비중이 바뀌어서, 여론조사가 필요없다는 설명이 장황하다. 하지만 변화와 맞물려 벌어지는 현실은 눈 뜨고 못 볼 정도다. 당 개혁이나 총선 승리 비전 대신 대통령과의 식사·전화 이력이 더 중요해졌다. "재롱잔치"라고 비판받는 친분 경쟁, 충성 경쟁이 눈물겹고 낯뜨겁다. 심지어 "총선은 대통령 간판으로 치르기 때문에 누가 대표라도 상관없다"는 주장도 흘러나온다. 당 외연 확장은 어림도 없다. 대통령 부인 팬클럽 회장 출신과 강성 보수 유튜버들이 참전했다. 100% 당원 투표면 이들이 선전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회창 대세론에 취해 오른쪽으로만 내달렸던 그 시절보다 오히려 더하다.
이런 여당의 태도엔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하다. 전방위적인 사법 리스크에 갇혀있는 '적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존재다. 상대가 '이재명의 민주당'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선거든 해볼 만하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여당 내부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민심은 무섭다. 바로 앞집 민주당이 반면교사다. 약체 야당을 만난 덕에 총선에서 180석을 얻으며 떵떵거렸다. 20년 집권 운운하며 기고만장했지만 윤석열 후보를 등에 업은 국민의힘의 역습 한 방에 당했다. 찬스 다음엔 위기, 위기 다음엔 찬스다. 천당과 지옥은 잠깐 사이에 바뀐다. 여당은 이 대표를 너무 믿는 것 아닌가.
서승욱 논설위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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