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예전 성공은 잊어라, 중력의 법칙 거부하라
2023년, 한국경제 재도약의 조건
이번 CES에는 미국·중국에 이어 한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수의 기업이 참가한다. 이래저래 한국인만 1만 명이 넘을 거란 소문이다. 젊고 활기찬 이 메신저 방의 열기를 접하다 보면 국내 뉴스에 답답하기만 했던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다.
한국의 혁신기술 전 세계가 주목
올 CES에서는 삼성전자가 46개로 가장 많은 혁신상을 받는 것을 비롯, 국내 대기업과 젊은 벤처기업들이 혁신상을 휩쓸고 있다. ‘닷 패드(Dot Pad)’라는 실시간 촉각 디스플레이를 출시한 벤처기업은 3개 부문의 혁신상을 받으면서 시각장애인들의 애플이라는 찬사까지 듣고 있다. 어느새 CES를 포함하여 세계 3대 정보통신분야 전시회로 불리는 유럽의 전자정보기술전시회(IFA)와 스페인의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까지 모두 미국과 중국을 제외하면 사실상 한국의 혁신기술을 선보이는 무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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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CES 무대 휘젓는 한국 기업들
개도국서 일어선 유일한 국가로
과거 ‘추격자 방식’ 더는 안 통해
주력산업 패러다임 과감히 깨야
‘중력의 틀’서 벗어난 상대성이론
규제 혁파로 ‘제2의 비상’ 이뤄야
」
불과 반세기 전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던 때를 생각하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경제개발을 시작했고, 심지어 한국보다 몇 배나 높은 소득 수준에서 출발했던 그 많은 개발도상국은 오늘 CES 전시장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 왜 한국만 유독 예외가 되었는가.
가장 근거 있는 미래예측은 정립된 이론을 따르는 것이다. 대포를 쏘았을 때 얼마나 멀리 갈지는 뉴턴의 중력이론으로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경제발전의 궤적을 예측하는 데도 상품공간이론이라는 유사한 종류의 중력이론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가난한 개발도상국은 대부분 농업이나 섬유 같은 저기술 산업을 영위하고 있다. 발전해보겠다고 나서면 농산물 포장이나 섬유염색 정도를 시도하게 된다. 기존의 노하우와 가깝지만 기술적으로 조금 수준이 높고 부가가치가 있는 산업을 하는 게 그나마 실패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한 단계씩 기술수준을 높여가다 보면 결국 반도체와 같은 첨단산업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이론이다.
“기존에 해오던 대로”의 유혹
알아듣기는 쉽지만, 이 이론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이렇게 한 단계씩 진화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이 조금 더 수준 높은 일을 해보겠다고 마음먹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데 있다. 그저 오늘 농사지어 내일 먹고 살면 되는데, 굳이 새로운 것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게 어려운 것은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기존 산업에 거미줄처럼 얽힌 이해 관계망이 새로운 산업으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상품공간이론은 경제발전 이론 가운데 뉴턴의 중력이론과 가장 닮았다. 기존에 하던 것을 계속하는 게 편하다는 관성이 엄청난 중력으로 발목을 잡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상품공간이론이 예측하는 것과 달리 기존에 해오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분야에 과감히 도전하는 ‘도약’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해보지 않던 것이니 실패 가능성도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고, 그 두려움 때문에 마음 내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래서 도약을 이뤄낸 개발도상국이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 유일한 예외가 바로 한국이다. 1960년대 전형적인 농업국가였던 한국이 놀랍게도 단 한 번에 반도체·자동차·철강·기계·화학·조선 등 당시 상황으로는 비약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도전을 했다. 선진국의 많은 싱크탱크가 상품공간이론과 유사한 중력이론에 근거해 너무 위험한 도전이라고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과감히 중력을 거부하고 날아올랐고, 지난 50년간 수많은 국가의 경제발전 역사에서 유일한 성공 사례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이유
중력을 거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과학기술 분야의 패러다임 이론과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19세기까지 뉴턴의 고전역학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고 있던 상황에서 물리학자들은 다른 이론적인 설명을 시도하기가 어려웠다. 기존의 뉴턴 패러다임 안에서 작은 개선 아이디어를 내고, 학계에서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것은 이 중력을 뚫고 상대성이론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도약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면 모든 성공적 혁신은 기존의 것을 하면 편하다는 중력을 거스르고 도약을 시도한 결과다. 경제발전이든, 과학기술이든, 심지어 개인의 발전도 마찬가지다.
이 도약 과정에서 한국은 최소한 산업 분야에서만큼은 오랜 정체를 벗어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자는 국가적 공감대와 전략이 있었다. 게다가 사람과 과학기술이라는 도약의 두 가지 필수 인프라에 미친 듯이 투자했다. 사람에 대한 투자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고등교육 진학률로 증명되듯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도 마찬가지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대를 막 넘어서고 있던 1990년대 중반에 이미 GDP의 2%가 넘는 돈을 연구개발에 쏟아부었다. 당시 세계 9번째로 높은 수준으로, 앞선 8개 나라는 모두 전통적인 기술선진국들이었다. 저소득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1만 달러를 넘은 중진국 가운데도 이처럼 대대적으로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국가는 전무후무했다. 이 두 분야의 투자는 정권의 정치적 성향과도 무관하게 정부 예산편성에서 늘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기업 부문에서도 연구소를 설립해 기술자를 채용하고 기술개발에 나서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가난한 집일수록 오늘 당장 돈 쓸 일이 많은 법인데, 국가적으로 사람과 기술에 목숨 걸듯 투자한 것은 현재 급하지 않지만, 미래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썼다는 증거다. 투자의 효과가 당장 내 임기 안에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꾸준히 투자한 것은 미스터리에 가깝다. 어쨌든 그 덕분에 다들 실패할 것이라고 예측한 놀라운 도약에 성공할 수 있었다.
2023년을 맞아 여러 연구소와 컨설팅 기관, 전문가들이 나름의 이론에 근거하여 한국 산업의 미래를 예측하는 자료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 예측은 예측일 뿐이다. 상품공간이론은 현재 우리를 둘러싼 관성이 중력으로 작용하여 도약이 쉽지 않다는 강력한 이론적 예측을 제시했지만, 결국 이 예측을 뛰어넘는 도전, 즉 중력을 거부하는 도약을 할 때 비로소 혁신의 역사를 쓸 수 있다. 예측은 앞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 그 절벽을 돌파하든 날아오르든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의 간절함과 의지, 그리고 이를 반영한 전략이 있을 때다.
지금 한국은 또 다른 중력에 사로잡혀 있다. 과거 성공적 도약의 결과로 얻게 된 주력산업의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추격기 동안 유효했던 산업구조와 교육의 틀이 여전하며, 효율적 실행을 뒷받침해 온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 또한 강고한 중력으로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있다.
디지털 헬스케어, 에너지 기술 미흡
이번 CES만 봐도 그렇다. 올해 전시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는 다른 나라 유니콘 기업의 주제 발표를 부럽게 듣기만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의료 빅데이터와 관련 기술이 있음에도 국내의 각종 규제에 막혀 젊은 기업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해볼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핵심 키워드인 에너지 절감 분야도 마찬가지다. 에너지 가격 체계가 보조금과 규제의 틀에 묶여 있는 탓에 에너지 절감 서비스에 기꺼이 돈을 쓸 사람이 없다. 그래서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를 맞아 특히 유럽의 청년 벤처기업가들이 기발한 기술과 과감한 아이디어로 도전하는 모습을 팔짱 끼고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 미지의 기술과 산업으로 과감히 뛰어들 수 있도록 한국 사회의 틀을 바꿀 때라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지금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도전했던 그때와 다르다. 눈물겨운 노력으로 쌓아 올린 세계적인 제조역량이 있고, 과학기술 역량 또한 많이 축적되었다. 추격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더 역량이 뛰어난 젊은 세대들도 있다. 그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도약대가 있다.
2023년은 오늘의 한국을 만들어낸 첫 번째 도약의 역사책을 덮는 반환점이기를 바란다. 나아가 다시 한번 중력을 거부하고 비상하는, 새로운 재도약의 역사책을 쓰는 기점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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