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으로 읽는 책] 심언주 『처음인 양』
나는 살아간다.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생각하지 않아도 살아간다. 생각하다가 불을 끄지 않고 살아간다. 가스불을 끄지 않아 출근길을 되돌아간다. 불 끄러 갔다가 불이 꺼져 있어서 살아간다. 조금 늦게 출발하면서 조금 늦게 도착하면서 살아간다. 불을 끄면 생각이 켜진다. 생각. 생각. 생각. 생각을 품은 채 잠이 들고 생각을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생각은 생각을 키우고 생각에 곰팡이가 필 때까지 꺼지지 않는 생각에 발목이 잡혀 살아간다. 나뭇가지처럼 뻗은 길 끝에 집이 매달려 있고 내 생각은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흔들리면서 살아간다. (…) 생각 없이 앞만 보며 간다. 아무데나 생각을 쏟아내다가 내가 쏟아지면서 살아간다. 생각이 싹트는 걸 보면서 간다. 다시 생각하면서 간다. 살아 있으면 간다. 나는 살아간다. 나는 살아서 어딘가로 간다.
심언주 『처음인 양』
새해 첫 시로 좀 무거운 선택일까. 심언주 시집 중, 너무 많은 생각에 압사할 것 같은 시 ‘묻지도 않고’다. 한때는 새해 아침엔 희망적인 글을 읽거나 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도 ‘생각’이다. 생각보다 삶이다. 새해엔 생각의 과포화 없는 가볍고 자유로운 삶을 꿈꿔본다.
‘어디 숨겼는지/ 언제 저질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잘못들이 몰려나와/꽃으로 웃고 있어서// 혼낼 수 없는 봄날엔// 괜찮아,/ 잘했어.// 저지르지 않은 잘못까지 용서해준다.’ 시 ‘봄날’의 일부다. ‘봄날’을 새해 아침으로 바꿔 읽으며, 지난 일을 훌훌 털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으시기를.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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