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취업, 영국 유학, 그리고 귀촌... "이런 도전 처음이에요" [월간 옥이네]

월간 옥이네 2023. 1. 1.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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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전진 대신 옆으로의 확장, '농촌에서 살아보기' 통해 옥천서 시골살이 나선 김현진씨

[월간 옥이네]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하고 고래실이 주관한 '농촌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통해 충북 옥천을 찾아온 김현진(37)씨
ⓒ 월간 옥이네
 
가끔 세상이 직선으로만 이루어졌단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앞과 뒤만 존재하고 옆이 없다는 기분이다. 사회경제적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길 외에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더 큰 도시로 더 많은 연봉으로만 앞다퉈 올라가라 채찍질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앞으로 가는 대신 '옆'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사람도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하고 고래실이 주관한 '농촌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통해 충북 옥천을 찾아온 청년, 농촌과는 평생 처음 연을 맺었다는 김현진(37)씨를 만났다. 귀농·귀촌의 행로에 들어선 이유를 듣고 싶어서다.

도시 사람이 농촌 살이를 결심한 이유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 인구수 332만 명을 웃도는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김현진씨는 완벽한 '도시 사람'이었다. 친지들조차 도시에 살아 농촌에는 발을 들일 일이 거의 없었단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서울로 취직해 직장 생활을 이어갔기에 성인이 된 후에도 농촌과 연이 닿지 않았다.

"어릴 때 명절이면 시골 친척집에 가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답답한 도시를 벗어나 해방되는 걸 바라보는 느낌이랄까요? 그렇다고 시골에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농촌이 좋고 싫고를 떠나서 애초에 시골에 산다는 선택지를 상상 못 한 거죠.

그러다 4년 동안 직장 생활하며 집과 회사만 반복해 왔다 갔다 하면서부터 변화가 필요해졌어요.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고, 마음이 공허해졌거든요. 안 되겠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고 마음먹고는 영국으로 대학원 유학을 가게 됐죠."

그에게 영국 생활은 큰 전환점이 됐다. 영국에서도 '컨츄리'(시골)에 있는 학교를 다니며 다양한 삶의 방식을 체험한 것. 아침이면 수영과 조깅을 즐겼고, 좋은 성적을 닦달하는 한국 교육법과는 달리 토론과 사색을 중시하는 가르침이 교양은 물론 마음의 깊이까지 확장시켜줬다. 고요한 나무들 사이로 영국 숲을 산책하던 기억, 야생화 흐드러진 영국 들판에서 마음의 평화를 누린 추억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농촌에 대한 이끌림을 불러일으켰다.

"3년 만에 귀국해서 한동안 쉬었어요. 마음을 정리하면서 어떻게 내 길을 다시 걸어야 할까 고민했죠. 쉬는 동안 여러 식물을 길렀는데, 농촌에 가 살아보자는 생각이 커졌어요. 올해 1월부터 정착 준비에 나섰죠. 외국에서 사귄 친구들은 응원해줬는데 부모님은 농촌 살이를 반대하셨어요. 제가 얼른 회사에 취직하길 원하셨죠. 하지만 찬성이든 반대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 길이니 제가 결정하고 싶었죠."
 
 김현진씨는 '1년간의 준비를 통해 농촌 살이의 진로를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 월간 옥이네
 
우리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주하는 걸 '내려간다'고 표현할 때가 많다. 도시보다 북쪽에 있어도 그렇다. 서울로 '올라가는' 것 역시 그런 사회 인식이 빚어낸 경향이다. 김씨 표현대로는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나를 원하는 사람이 그곳에 더 많을 듯해" 도시로 향하는 게 청년들의 현실이다. 일자리가 없어서, 다들 도시로 가니까, 성공하려면 '큰물'에 발을 들여야 하니까 등의 이유로 농촌은 청년을 잃는다. 하지만 김씨는 세상이 시키는 방향으로만 걷지 않고자 했다.

"농촌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알게 돼서 옥천에 왔는데, 제가 인생에서 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도가 가득한 곳이었어요. 기부도 해보고, 잘은 못 그려도 그림도 배우고, 목공이나 칼 갈기 같은 소소한 생활기술도 터득했어요. 제일 좋은 건 동물들과 허물없이 만나고 보살펴줄 수 있다는 점이에요. 낯선 장소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제가 돌보는 고양이 두 마리가 다 풀어주더라고요. 살아오며 이런 도전은 처음인 기분이죠."

정확한 보폭으로 옥천 정착을 향해 걷다

타지로의 이주는 누구에게나 불안을 동반하는 모험이다. 어떻게 집을 구할지, 어디서 일해 생계를 유지할지, 마을의 누구와 교류하고 어떻게 소통할지 등 늘어놓자면 끝도 없을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런 고민과 해결의 순간을 큰 도전과제의 세부 항목이라 생각하고 방향을 유지하겠단 각오였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과 배워야 할 것, 당장은 실현 불가능한 것부터 구분해 정리했다. 이 1년간의 준비를 통해 그는 농촌 살이의 진로를 확신하게 됐다.

"저는 농사 전문 지식도 부족하고, 당장 시도할만한 재원도 없어요. 지금 귀농에 도전하면 생계유지가 곤란하겠죠. 농사공부는 천천히 해나갈 생각이에요. 마당이나 텃밭에서 소규모로 작물을 길러보며 단계별로 성장해야죠. 길게 계획한 건 허브를 키워 가공상품을 만들거나 체험농장을 꾸리는 거예요. 지금은 귀촌에 적응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가 택한 적응법은 '참여'다. 옥천 곳곳에서 열리는 문화 행사며 체험 프로그램, 강연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고래실이 진행한 '시골언니프로젝트 - 여성로컬미디어주간'(월간옥이네 2022년 10월호 기사 참조)'에 참여하며 시골언니는 물론 도시언니들과도 교류를 나눴고, 역시 고래실이 진행한 '옥천 청년생활기술학교' 2주 교육과정을 들으며 각종 공구며 칼, 생활전기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이는 농촌에서 누릴 수 있는 문화 활동을 빠짐없이 경험하고 싶은 의지, 생존을 위해 지역 공동체에 합류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생활을 윤택하게 해줄 소소한 손기술 터득까지 모두 충족하는 방법이 됐다.

"그 경험이 제게 지침이자 격려가 됐어요. 시골언니프로젝트에서 만난 분들과 대화하며 저처럼 삶의 전환을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확인했고, 불안을 많이 떨쳐낼 수 있었죠. 생활기술학교에서는 실전 농촌 살이에 꼭 필요한 것을 배워서 참 좋았어요. 방충망 교체법이나 칼 가는 법, 자잘한 수리에 필요한 드릴 사용법 같은 건 제가 옥천에서 계속 써먹게 될 기술이잖아요."

한 걸음 한 걸음, 정착 행보는 전진해나갔다. 지역은 안남면으로 정했고, 수소문 끝에 소개받아 거주할 집도 구했다. 오래되고 허름한 집안 시설은 집주인과 협의해 수리를 받고 입주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생계 문제도 안남면의 빵 맛집으로 통하는 '아는사람빵집 붴' 취직하며 한시름 놓게 됐다. 농촌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 중 견학차 가게를 찾은 김씨에게 이곳을 운영하는 한상옥·김석태씨 부부가 일자리를 제안했다고.

"붴이 타지에서도 찾아오는 우리밀 빵 맛집이더라고요. 저도 일 시작하자마자 바쁘게 뛰어 다녔어요. 제가 비건이라서 홈 베이킹을 조금해 본 경험이 있지만, 본격적인 제빵은 이제 배워야 해요.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가게 성장에도 보탬이 되고 싶어요. 그러면서 농업기술을 차근차근 배워나가려고요."

겉만 아니라 속까지 만족스러운 옥천
 
 김현진씨의 소망은 친구를 많이 찾는 것이다. 도시에 비해 가장 부족한 건 돈도, 기반시설도, 넘쳐나는 배달 가게도 아닌 친구라고.
ⓒ 월간 옥이네
 
"옥천에 와서야 알게 된 게 너무 많아요. 특히 로컬푸드와 우리 농산물 역사랑 현실요. 소중함이야 말할 것도 없죠. 제가 영국에서 빵을 많이 먹었거든요? 그땐 배탈이 난 적도 없고 속도 편안했는데, 귀국해서 빵만 먹으면 속이 안 좋더라고요. 참 이상했는데 옥천에서 우리밀 빵 먹으면서 깨달았어요. 먹어도 너무너무 속이 편안한 거 있죠. 바다를 건너오면서 방부제 처리한 수입 밀, 유전자 조작된 GMO 원료로 만든 먹거리가 제 몸을 힘들게 했단 걸요."

김씨가 붴의 성장을 소망하고 돕겠다 나선 데에는 이런 깨달음이 크게 작용했다. 이곳에서 만든 우리밀 빵 속에는 먹거리 이상의 로컬푸드 정신, 농본을 향한 철학이 담겨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옥천 정착을 시작하기 전에는 몰랐던 우리 농산물의 가치와 식량주권의 소중함, 농민들의 땀과 눈물의 가치를 실천하는 주민들의 활동이 감동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옥천의 정서와 철학마저 사랑하게 됐다는 뜻이다.

"마을에서 어르신들 뵈면 젊은 사람이 없으니 주민들께서 '일꾼 왔다'며 격하게 반가워하셔요. 아직 능숙하게 농촌 살림 꾸릴 줄도 모르는데, 마을 공동 행사 같은 데 저를 '부려먹겠다'고 농을 건네시기도 하고요. 이런 게 살짝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저를 구성원으로 인정하겠다는 마음이잖아요. 저는 옥천이 겉모습만 좋은 게 아니라, 내밀한 속내까지 만족스러워요."

김씨도 사람인 이상 낯선 환경이 불편할 때도 있다. 특히 사생활의 경계가 애매한 부분이 그렇다. 현관 대신 마당이 익숙한 주민들이 불쑥 찾아오거나 할 때가 부담스럽다고. 그래도 그는 '적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지점'이라 말한다. 그런 공동체 문화를 거부하기만 한다면 이웃이 되기 어렵고, 애초에 농촌 정착이 아니라 도시에 남았어야 한다는 것. 변화를 바라고 왔는데 입맛에 맞는 변화만을 취사선택할 생각은 없단다.

"장기 정착은 살아보며 고민해야겠지만 지금은 만족스러워요. 저는 옥천에 와서 도시보다 더 바쁘게 살아요. 도시에서는 바쁜 게 하루 종일 회사에만 틀어박힌 형태잖아요. 여기서는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도전이 가득해요. 바빠도 옥천식으로 바쁘니까 즐거워요. 이번이 저의 첫 번째 시골 인생인데, 앞으로도 터전이 되길 기대해요."

김현진씨의 소망은 친구를 많이 찾는 것이다. 도시에 비해 가장 부족한 건 돈도, 기반시설도, 넘쳐나는 배달 가게도 아닌 친구라고. 당장 그가 보금자리로 정한 안남면만 해도 청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요 앞 가게 따님도 제 또래예요"라는 김씨의 말은 농촌에서 청년이 희귀한 존재임을 방증한다. 도시였다면 어느 가게 자녀가 청년이란 걸 기억할 필요가 있을까. 농촌으로의 이주는 또래와 인간관계에 목마른 삶이 되기 쉽고, 삶의 뿌리마저 통째로 옮기는 대격변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김씨처럼 '농촌에서 살아보기'로, 혹은 청성면의 교육귀촌으로, 군서의 이주축산농가로 새 얼굴을 들일 청년들이 계속 나타나리란 희망을 건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새로운 김현진씨가 계속 늘어나기를.

월간 옥이네 통권 66호 (2022년 12월호)
글·사진 김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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