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들린 '쿵' 소리 정체…칸이 택한 거장, 그가 그려낸 집단기억
영화가 시작되면 고요한 새벽을 깨우는 ‘쿵’ 소리가 울려 퍼진다. 잠에서 깬 제시카(틸다 스윈튼)는 침대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지만, 소리의 출처를 찾을 수 없다. 콜롬비아에 체류 중인 제시카는 자신을 맴도는 이 미지의 폭발음이 자신에게만 들린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의 근원을 찾아 콜롬비아 곳곳으로 여정을 떠난다.
2010년 ‘엉클 분미’로 제63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태국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신작 ‘메모리아’(지난달 29일 개봉)는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배경으로 정적인 영상미와 형용하기 힘든 몽환적인 이야기를 펼쳐내는 작품이다. 고유한 스타일은 유지됐지만, 줄곧 태국에서 작업해온 위라세타쿤이 처음으로 고국을 떠나 콜롬비아에서 찍고, 할리우드 배우 틸다 스윈튼과 작업한 영화라는 점에서는 그의 전작들과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
태국 떠난 태국 거장, 틸다 스윈튼과 콜롬비아로
2015년작 ‘찬란함의 무덤’을 끝으로 더는 태국에서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한 감독이 남미의 콜롬비아를 배경으로, 의문의 소리를 듣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난달 22일 화상으로 만난 위라세타쿤 감독은 “콜롬비아의 사람들과 자연에는 일종의 멜랑콜리가 서려 있었다”며 “그곳에서 내 영화의 색다른 유형을 발견하고, 새로운 장을 열고 싶었다”고 했다.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처음 접하는 관객이라면, ‘메모리아’의 초반부만 본 뒤 소리의 정체가 결말에 이르러 시원하게 밝혀지는 추리극이나 스릴러를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리 쉽게 답을 내주지 않는다. 제시카는 에르난이란 이름의 음향 엔지니어를 찾아가 자신이 들은 소리를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며칠 뒤 다시 찾아간 에르난의 사무실 건물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현실과 상상, 의식과 무의식를 오간다.
정처 없이 숲속을 걷다 만난 또 다른 남자의 이름 역시 에르난인데, 그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기억하는 영적인 존재다. 돌멩이에 새겨진 소리까지 재생할 수 있는 에르난과 연결된 제시카는 자연과 사물에 겹겹이 쌓인 소리를 들으며 어떠한 감흥에 휩싸이고, 마침내 자신을 맴돌던 소리의 실체에 다가선다. 관객에게 그 실체는 불분명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따라가며 태초부터 누적된 인류의 기억을 청각적으로 목도하고, 그 안에 휩싸이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된다.
수면 중 들은 폭발음, 집단적 트라우마와 연결
전작들에서 태국의 뿌리 깊은 트라우마를 신화적 은유와 구조적 장치로 녹여낸 위라세타쿤은 ‘메모리아’에서도 그가 발 디딘 땅에 서린 아픔을 기억하고자 했다. “그저 직감에 따라” 여행하던 중 콜롬비아에 당도한 그가 그곳에서 보고들은 역사적·정치적 상황은 ‘메모리아’의 영감이 됐다.
“콜롬비아는 오랫동안 내전과 마약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영화를 찍기 몇 해 전 (정부와 반군 간)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여전히 누가, 어떻게 그간의 수많은 죽음을 책임질 것인지 등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억압과 폭력,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고,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 그게 이 나라의 역사였다.”
위라세타쿤은 이처럼 과거의 기억 속을 헤매는 듯한 한 나라의 모습에서 자신이 앓았던 ‘폭발성머리증후군’(수면 도중 머릿속에서 폭발음이 들리는 수면 장애)을 떠올렸고, 비슷한 증상을 겪는 제시카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내가 겪은 이 증상이 콜롬비아가 지닌 기억에 대한 일종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콜롬비아가 겪는 혼란은 우리 모두와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트라우마, 내면의 갈등과 싸우는 존재들이지 않나. 이런 연관성을 떠올리면서 단절됐으나 다시 연결되고자 노력하는 제시카라는 인물을 그렸다.” 미지의 쿵 소리로 발현된 트라우마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제시카는, 깊은 갈등의 골에 매여 있는 콜롬비아, 더 나아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 모두에 대한 비유이자 상징인 셈이다.
이렇듯 늘 개인적·집단적 ‘기억’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아온 위라세타쿤은 “기억은 우리 자아를 형성해주는 기반”이라 정의하며, “내가 영화를 찍는 이유도 내 기억을 풀어내고, 사랑하는 사람과 풍경을 기록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어 “나는 항상 영화를 통해 기억을 탐구하며 ‘개인적 기억이라는 게 존재하나?’와 같은 질문을 품어왔다. 왜냐면 나는 우리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이며, 모든 기억은 집단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메모리아’, 사랑·연대 말하는 심플한 영화”
배우 틸다 스윈튼은 인물과 배경에 온전히 스며든 연기로 영화를 이끈다. 감독은 “스윈튼은 실제로는 매우 쾌활한 사람이지만, 나는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찾아나가는 사색적인 인물의 비애와 강인함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스윈튼이 인물을 세밀하게 구현하며 숨을 불어넣는 모습은 정말 놀라웠다”고 말했다.
위라세타쿤은 '메모리아'가 스윈튼과의 우정의 산물이라고 했다. “스윈튼이 칸에서 내 영화 ‘열대병’(2004)을 본 뒤로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어 각자의 ‘꿈의 영화’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 영화가 이런 심플한 작품이 될 줄은 몰랐지만, ‘메모리아’는 바로 그런 심플함 때문에 더욱 중요한 영화다. 마치 우리 우정처럼, 어떤 거창한 걸 하지 않고도, 그저 사랑과 연대와 같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만으로 이뤄진 영화다.”
인터뷰 동안 ‘연결(connection)’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길 권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과 온전히 동기화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 질문하지 말고, 그저 영화와 함께 존재해주세요. 그러면 시간여행을 하는 우주선에 탄 듯,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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