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누비는 베이스 박종민, “가사 100번 외워 안 되면 200번 외우죠”
함부르크 오페라, 빈 국립오페라 솔리스트…2020년 프리
"가창이 중요한 베르디, 해석 필요한 바그너 비중 절반 이상"
4월 ‘맥베스’로 국내 오페라 데뷔, 2026년까지 풀 스케줄
"오 벗들이여, 이 노랫소리는 아니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휘몰아치던 현악기·관악기·타악기가 4악장 첫 소절을 재연한 직후, 베이스 박종민의 묵직한 노래가 홀 전체에 깔린다. 소름 돋는 저음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연말 ‘합창’ 시즌 서울시향의 연주마다 베이스 박종민(36)의 음성이 함께했다. 작년 음악감독 오스모 벤스케의 낙상으로 긴급 대타로 투입된 김선욱을 비롯해, 마르쿠스 슈텐츠(2019~2020), 티에리 피셔(2017~2018), 정명훈(2011, 2013~2015) 등 지휘자는 다양했지만 서울시향 ‘합창’을 찾았던 관객들에게 박종민의 저음은 익숙하다.
“베이스 노래를 시작으로 1, 2, 3악장과는 전혀 다른 음악이 나와야 합니다. 암흑에서 광명으로, 혼돈에서 조화로 향해야죠. 오케스트라, 합창, 솔로이스트가 청중을 희망적이고 따스한 생각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김선욱 지휘자는 준비를 많이 하고 나왔음이 느껴졌어요.”
박종민의 스케줄은 2026년까지 빼곡하다. 작년 한 해에만도 라 스칼라 극장의 ‘카풀레티와 몬테키’, ‘돈 조반니’,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 ‘가면무도회’, 부다페스트 극장의 ‘발퀴레’, 슈타인브루흐 야외 오페라 ‘나부코’, 마드리드 왕립극장 ‘아이다’에서 활약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관객들은 평론가같이 냉철해서 가수들의 부담감이 크죠. 오스트리아 인구가 900만인데 장크트 마르가레텐의 합스부르크 왕가 채석장에서 열리는 슈타인브루흐 페스티벌은 스무 번 공연을 하는데 매번 2만 석이 가득 찹니다. 그 저변이 놀라웠죠.”
박종민은 사업가인 아버지와 고등학교 음악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주말마다 예술의전당 음악회에 데려가고 CD를 사주는 건 물론 집에서도 스리 테너 DVD나 교향곡 음반으로 음악을 접하게 해줬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대중가요를 잘 불러 장기자랑에서 수상을 하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고교도 인문계로 진학했고 부모님은 아들이 외교관이 되기를 희망했다. 영어를 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더 마음이 끌렸던 성악의 길을 택했다.
그의 유럽 진출 전초기지는 밀라노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에서 공부하고 2007년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콩쿠르에 나갔을 때 라 스칼라 극장 관계자의 눈에 띄었다. 스칼라 아카데미의 일원이 됐다. 이탈리아 정부와 라 스칼라 극장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미렐라 프레니, 레나토 브루손 등 극장 전속 성악가들에게 3년 동안 레슨을 받았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배움의 연속이었죠. 노래하다가 다른 학생들 노래하는 것도 보고요. 프레니 선생님의 남편이 명 베이스 니콜라이 갸우로프여서 세부적인 내용까지 배울 수 있었어요.”
이후 박종민은 3년간 함부르크 오페라, 7년간 빈 국립오페라의 전속 솔로이스트로 활동하다가 더욱 다양한 무대에 서기 위해 2020년 프리를 선언했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2015 BBC 카디프 콩쿠르 가곡상으로 국제적인 커리어가 이미 확고해져 있었다.
“BBC 카디프 콩쿠르에서는 슈베르트, 슈만, 토스티 외에 1차 첫 곡과 파이널 마지막 곡으로 각각 한국가곡인 김순애의 ‘그대 있음에’와 조두남의 ‘뱃노래’를 불렀어요. 우리 가곡을 알리고 싶었거든요.”
박종민은 이 콩쿠르에서의 열창으로 런던 위그모어홀 대표의 눈에 띄어 리사이틀도 가졌다. 2017년 세상을 떠난 체코의 명지휘자 이르지 벨로흘라베크 유작 녹음인 드보르자크 ‘스타바트 마테르’(데카) 음반에 참여했고, 2019년 10월에는 ‘라 보엠’ 중 콜리네 역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페라 배역으로 베르디와 바그너의 작품들을 꼽았다. 자신의 레퍼토리에서 두 작곡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는다고 했다.
“베르디는 기교가 완성된 상태에서 ‘가창’이 확실해야 합니다. 반면 바그너는 ‘해석’이 더 중요하죠. 요컨대 이탈리아 오페라는 가창, 독일 오페라와 리트(Lied·가곡)는 내용이죠. 극에 녹아들지 않으면 가창이 뛰어나도 독일 청중이 싫어합니다.”
최근 박종민은 천천히 바그너를 늘려간다. 로렌이나 캉 등 프랑스 소규모 극장의 바그너 오페라 출연도 눈에 띈다. 이는 파리 진출을 위한 포석으로도 보인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마르케 왕을 노래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어디선가 불러봤고 성공적이었다는 증명이 있어야 도약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향의 새 음악감독인 야프 판 즈베던과의 인연도 바그너로 이어져 있다. 판 즈베던의 댈러스 심포니 음악감독 시절 바그너 ‘발퀴레’ 중 훈딩 역할로 출연했다.
“판 즈베던이 댈러스 심포니 현악 주자들에게 자세히 주문하던 게 인상적이었어요.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있었던 동양인 차별의 분위기가 전혀 없이 동등하게 대해줬습니다.”
박종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오페라계의 변화를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얼마 전 마드리드 왕립극장 ‘아이다’에 제사장 람피스 역으로 출연했을 때 러시아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타이틀 롤 아이다 역을, 그녀의 남편인 테너 유시프 에이바조프가 라다메스 역을 맡았다. 시작 전부터 반전 단체가 ‘푸틴 침공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공연이 시작된 후에도 야유와 환호가 반반으로 갈렸다. 전쟁 초기 네트렙코는 푸틴 옹호자로 알려졌지만 최근 전쟁과 푸틴에 반대한다는 확실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박종민은 “음악가는 정치인과 다르다. 전쟁을 옹호하거나 지지해선 안 된다. 인류를 화합하게 하고 냉정한 현실에 음악으로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 성악가로서 유럽에서 통하는 비결을 물었다. 유럽인이 생각하는 한국인 상과 부합되면 된다는 게 답이었다. 근면, 성실, 지각하지 않는 것, 그리고 ‘빨리빨리’를 좋아한다고 했다. 언어상으로도 중국인은 성조, 일본인은 발음 문제가 있어 한국인이 가장 유리하다고 한다. 그의 인상은 수염 때문에 강하게 다가온다. 미소년 같은 과거 프로필 사진과 딴판이다. 수염을 기르는 이유는 대부분이 나이 많은 역할이어서 어려 보이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분장 수염을 붙일 때도 본인의 수염이 있으면 수월하다고 했다. 박종민의 아내인 소프라노 양제경 역시 유럽에서 활동하는 성악가다. “예전엔 아내와 서로의 노래를 냉철하게 비판하곤 했어요. 요즘은 안 그럽니다. 장점을 말하고 서로 격려하며 업그레이드하자는 주의죠.”
박종민은 올해 1~2월 로렌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3월 김은선 지휘 라 스칼라 오페라의 ‘라 보엠’, 3~4월에는 캉 극장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출연하고 4월에는 국립오페라 ‘맥베스’로 국내 오페라 첫 데뷔를 한다. 6월과 7월에는 라 스칼라의 ‘루살카’, ‘맥베스’에 합류하는 일정이다.
이런 스케줄이면 수많은 오페라 배역의 아리아 가사와 대사를 외우는 것만도 벅차지 않을까.
“왕도 같은 건 없죠. 100번 외워보고 안 되면 200번 외우는 수밖에요. 제가 거주하는 빈의 알테 도나우(옛 도나우)에 악보 가지고 나가서 외워질 때까지 불러보고 돌아옵니다. 힘들 때면 근사한 경치가 위안이 됩니다.”
류태형 객원기자·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ryu.taehyung@joongang.co.kr
류태형 객원기자·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ryu.tae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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