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눈꽃 여행, 엄마는 한 가지 생각뿐 [이제 겨우 절반 살았을 뿐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은퇴를 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떠나 있던 엄마랑 비혼 동생, 셋이 함께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이정혁 기자]
눈을 기다린다. 비 내리는 날도 좋지만, 바라고 바라던 눈이 내리는 날은 미열로 들뜬다. 눈 내리는 겨울에 태어난 아이의 숙명이다. 여느 해와 달리, 올해는 눈이 많이 온다. 여느 해보다 눈을 바랐던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눈꽃이다. 메마른 나뭇가지에 쌓여 꽃보다 찬란한 자태를 뽐내는 바로 그 눈꽃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와 산은 어울릴 수 없는 존재다. 평지도 걷기 힘든 엄마에게 산은 말 그대로 산이다. 오르지 못할 산. 몸이 성했던 젊은 시절에는 산행할 여유조차 없었고, 숨 돌릴 여유가 생길 때쯤, 몸이 무너졌다. 산 정상에 피어나는 눈꽃을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 엄마. 당신을 위해 무려 3개월을 기다렸다. 그리고, 원하는 만큼 눈이 내렸다.
무작정 눈꽃 구경을 떠날 수는 없다. 마음 같아서야 스위스의 융프라우로 모시고 싶지만, 엄마는 제주행 비행기도 타기 어렵다. 몇 가지 필요조건을 만족해야 했다. 산 정상까지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어야 한다. 설악산, 발왕산, 덕유산 몇 군데가 후보지에 오른다.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여야 한다. 집에서 가깝고 정상까지 케이블카를 운행하는 곳, 바로 무주에 있는 덕유산이다.
▲ 눈꽃없는 설경 날씨가 포근하고 햇볕이 좋아서 상고대를 볼수 없었다. 그래도 산 정상에서 보는 설경은 나름의 멋이 있다. |
ⓒ 이정혁 |
몇 해 전에 아이들과 함께 눈꽃을 보고 온 장소다. 엄마가 최대한 걷지 않고, 눈꽃을 볼 수 있는 대략의 동선도 머릿속에 그려 넣는다. 눈꽃보다 중요한 것이 엄마의 안전이고 건강이다. 엄마 연세에 낙상은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겨울 부츠를 챙기고, 정상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내복과 털모자를 챙긴다.
▲ 덕유산곤돌라 덕유산곤돌라 탑승장 앞에 길게 늘어선 줄. 평일 오전이었는데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 이정혁 |
덕유산 곤돌라 탑승장에 도착해서 또 한 번 놀랐다. 매표소 앞은 이미 긴 줄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도대체 평일 오전에 이 많은 사람이 어디에서 쏟아져 나온 걸까? 중장년의 실업문제는 심각한 사안임이 틀림없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매한 티켓을 찾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린다. 주말과 공휴일(10월부터 이듬해 2월)에는 사전예약제로 운영되므로, 예약하지 않으면, 탑승할 수 없다.
▲ 덕유산곤돌라-2. 덕유산곤돌라 안에서 바라본 무주스키장. |
ⓒ 이정혁 |
정상에 도착해 곤돌라에서 내렸는데, 하나도 춥지 않다. 내복과 살갗 사이로 습기가 올라온다. 햇살은 과하게 눈부시고, 매서운 칼바람은커녕 미풍조차 없다. 그래도, 산꼭대기인데, 눈꽃이 없을 리가 없지. 엄마를 부축해서 팔각정까지 간신히 오른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눈꽃이 없다. 하늘이 무심한 건지, 내가 눈 복이 없는 건지.
▲ 덕유산 정상-2 엄마와 함께라면 눈꽃쯤 못본다고 대수랴. 설원과 푸른 하늘로 마음을 달래본다. |
ⓒ 이정혁 |
벼르고 별러서 여기까지 왔는데, 실망한 기색을 들켜서는 안 된다. 멀리 눈 쌓인 산들을 보니 그나마 절경이다. 일부러 목소리에 흥을 실어 말한다. 그래도 눈 구경은 실컷 하네. 이렇게 파란 하늘 구경하기 힘들어. 미세먼지도 하나 없고, 눈꽃보다 훨씬 이쁘네. 엄마의 표정이 썩 밝지 않다. 그때까지만 해도, 눈꽃을 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 줄 착각했다.
팔각정 근처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이제는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다. 오르막길은 그나마 오를만 했는데, 내려가는 계단은 훨씬 미끄럽다. 엄마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용을 쓰고, 엄마를 부축하는 나는 엄마를 버텨내느라 용을 쓰고. 승천하지 못한 두 마리 용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하산하는 모습이 눈물겹다. 많지 않은 계단을 내려오고 나니 등에 땀이 찬다.
▲ 파란 하늘이 인상적인 덕유산 정상 곤돌라를 타고 올라와 덕유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
ⓒ 이정혁 |
어묵과 운동으로 허기를 달래고, 사진 몇 장을 더 찍고, 내려오는 곤돌라 안에서 엄마 표정의 비밀이 밝혀졌다. 혹시라도 넘어져서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면, 그 수발을 너희가 다 들어야 할 텐데. 머릿속이 온통 넘어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라, 눈이고 뭣이고 하나도 안 들어오더라. 엄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엄마에게 눈꽃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것이다. 그저 자식들한테 폐를 끼칠까 봐, 막상 따라나서긴 했지만, 내내 불안하고, 걱정한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눈꽃을 찾아보자며, 이곳저곳 이끌고 다녔으니.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 맘을 안다지만, 어미의 마음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멀다. 어미의 속은 너무 깊어 평생을 찾아다녀도 끝을 알기 어렵다.
그날 저녁, 우리는 조촐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송년회를 했다. 새해에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계획도 세웠다. 엄마는 주무시기 전에 결국, 몸살약을 드셨다. 온종일 온몸에 힘을 주고 다녀서, 근육과 인대가 놀랐던 것이리라. 그렇게 우리의 눈꽃 관람기는 절반의 실패로 끝을 맺었다. 눈꽃을 보고 싶었으나, 눈꽃을 보지 못한. 아니, 눈꽃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았던, 조금은 야속하고 서글픈 이야기.
이제, 엄마랑 놀기 프로젝트가 중반을 넘어섰다. 3개월 후면,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살아갈 것이다. 남은 시간 동안, 엄마에게 무엇을 보여주기보다, 엄마를 좀 더 이해하고, 천 길 같은 엄마의 속내를 어루만지는 기회를 만들자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엄마, 우리에게는 아직도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어. 눈꽃 따위, 다음번에는 맘 편히 다녀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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