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궁극에 가 닿으려는 이 영화, 얼마나 아름다운지
[김성호 기자]
모든 예술가가 궁극에 이르러 마주하는 질문이 있다. 삶의 목적은 무엇이고,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마거릿 미첼이 10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 집필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그에 대한 답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제 곁을 떠나가는 절망 가운데 매조지되는 소설은, 그럼에도 희망적이다. 스칼렛 오하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사로 대미를 장식한다.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어쨌든, 내일은 또 다른 날이야!". 우리는 작가의 의도를 살리면서도 문학적 멋까지 달성한 의역 덕분에 위 대사를 이렇게 기억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라고. 그렇다, 내일엔 새로운 태양이 뜬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고, 가족이 죽고, 친구가 배신하고, 사업이 파산하고,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갈지라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 속 또 다른 주인공 레트 버틀러의 마지막 대사 역시 삶의 또 다른 진실을 말한다. 그는 자신을 붙잡는 스칼렛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 드라이브 마이 카 포스터 |
ⓒ (주)트리플픽쳐스 |
삶이란 전적으로 제 자신의 것
옳은 말이다. 삶이란 전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에게 귀속된다. 가장 가까운 누구조차도 대신 책임질 수 없다. 마거릿 미첼은 삶이 모든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고, 운명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라도 내일은 내일의 희망을 갖고서 살아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절망 가운데서 인간을 구원하는 건 역시 인간이라고, 그러나 그조차도 다른 누구의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한다.
수많은 작가들이 같은 물음에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인생>을 쓴 소설가 위화와 그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감독 장예모도 그러했다. 소설과 영화는 모두 한 가지를 말한다. 삶은 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앗아가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원제인 '활착(活着·huó zhe)'은 직역하면 '살아간다는 것'이 되니, 곱씹을수록 주제가 더욱 선명해진다.
▲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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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 아내, 모른 척 하는 남편
주인공은 성공한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 분)다. 그는 드라마 작가인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 분)를 사랑한다. 오토에겐 특별한 습관이 있다. 가후쿠와 사랑을 나누며, 혹은 나눈 뒤에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가후쿠는 다음날 그 이야기를 정리해서 돌려준다. 그렇게 돌아온 이야기가 오토가 쓰는 작품의 소재가 된다. 말하자면 오토의 작품엔 가후쿠와의 섹스가 필요하다.
영화는 둘의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발가벗은 채 창을 등진 오토가 한 여자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야기 속 여자는 남자의 방에 몰래 숨어들길 반복한다. 그리고 저만 아는 물건을 그의 방에 남기고 돌아간다. 저만의 방식으로 그에게 조금씩 저를 묻혀가는 것이다.
침대에 누운 가후쿠의 시선에서 오토는 실루엣만 보이는 어두운 상태다. 푸르고 어두운 화면이 창백하게까지 느껴진다. 온기가 흐르지 않는 이 화면이 둘의 사이가 결코 화창하지 못하단 걸 암시한다.
▲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컷 |
ⓒ (주)트리플픽쳐스 |
시작하고 40분만에 시작되는 영화
영화는 한 순간 진전된다. 할 말이 있다며 돌아오면 대화를 나누자던 오토가 갑자기 죽어버린다. 돌연사다. 아내가 죽은 뒤 가후쿠는 다른 도시로 향한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히로시마다. 가후쿠가 히로시마로 운전해 가는 길에서 영화는 뒤늦게 오프닝 크레디트를 꺼내든다. 40분 만에 영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히로시마에서 가후쿠는 연극을 준비한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다. 세계 곳곳에서 배우들이 오디션을 보러 온다. 개중에선 오토가 죽기 전 마지막 작품을 함께 한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 분)도 있다. 그가 오토와 부정을 저질렀다고 가후쿠는 짐작한다. 그러나 그는, 아니 그렇기에 그는 다카츠키를 캐스팅한다. 그에게 준 배역은 모든 배우 중 유일하게 그가 희망한 것과 다르다. 주인공인 바냐 역을 가후쿠는 다카츠키에게 맡긴다.
다카츠키가 가후쿠를 찾아온 것도, 가후쿠가 다카츠키를 캐스팅하고 주연을 맡긴 것도, 둘이 거듭하여 의미심장한 만남을 이어가는 것도 모두 같은 이유다. 둘은 모두 오토를 사랑했고, 상대에게서 오토의 흔적을 느끼려 한다. 오토를 기억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지만 상대를 질투하는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저는 알지 못하는 오토의 이야기를 다카츠키는 알고 있다. 가후쿠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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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어지는 연극, 깊어가는 관계
연극이 준비되는 동안 미사키와 가후쿠의 관계는 점차 깊어진다. 미사키는 가후쿠가 소중히 여기는 자동차를 소중히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후쿠에겐 미사키의 운전이 남다르단 걸 알아보는 눈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소중히 하니 가까워지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일터와 집을 오가며 그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조금씩 때로는 훌쩍 그들은 서로를 알아간다. 특별한 우정이 태어나고, 서로를 위로하며, 마침내 변화가 이루어진다.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각자 내달리던 두 궤도를 하나로 겹쳐낸다. 연극과 가후쿠의 삶이 한 지점에 모여드는 것이다. 연극 <바냐 아저씨>의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극중 소냐(박유림 분)가 절망하는 바냐에게 저의 믿음을 이야기한다. "어쩌겠느냐"고 "계속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다른 이를 위해 열심히 살고 편하게 죽으면 되는 것"이라며 "저 세상에 가서 '우린 고통 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 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어여삐 여길 것"이라고 말한다. 바냐는 소냐로부터 구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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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그러나 영화는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영향을 잊지 않고 그려낸다. 가후쿠에겐 미사키가, 미사키에겐 가후쿠가 서로를 구원하는 계기가 된다. <바냐 아저씨>의 소냐가 바냐에게 그러했듯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가 스칼렛에게 그러했듯 말이다. 미사키는 가후쿠 덕에 무너진 집터로 돌아와 죽은 어머니에게 꽃을 던진다. 가후쿠는 미사키 덕에 오랫동안 끄집어내지 못했던 감정을 꺼내놓는다. 그는 "오토가 보고 싶다"고 "만나면 화를 내고 싶다"고 오열한다. 그렇게 제 감정을 직면하고 비로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고통은 고통대로, 절망은 절망대로 껴안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인정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삶 가운데 닥쳐오는 절망과 상실의 순간들과 이를 대하는 인간의 자세를 지속적으로 다뤄왔다. <해피 아워>에선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모습을 그렸고, <아사코>에선 닥쳐오는 삶 가운데 거듭되는 실패와 그 실패를 바로잡는 이의 용기를 다뤘다. <우연과 상상>에선 닥쳐오는 의도치 않은 재앙들을 돌아보는 한편으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의미를 갖는 순간을 포착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었으며,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맺는 관계의 의미에 대해 천착해왔다.
▲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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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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