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

김삼웅 2022. 12. 3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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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 2] 그가 태어난 때는 국가운세가 위기로 치닫고 있던 시기였다

[김삼웅 기자]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 태생인 월파 서민호 선생, 사진 하단 우측은 그의 형님이 살았다는 집
ⓒ 서정일
 
월파 서민호는 1903년 4월  27일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314번지에서 아버지 서화일(徐和日)과 어머니 이원례(李元禮)의 4남으로 태어났다. 고흥군은 전남 동남부에 위치하고 20여 개의 유인도와 150여 개의 무인도로,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이 있다.

고흥군은 근대에 이르러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에 육희도ㆍ구기서ㆍ송연호 등이 이끄는 3천여 명의 동학군이 백산전투에 앞장섰으며, 9월의 재봉기에도 참여하는 등 민족의식이 강한 지역이다. 

서민호가 태어난 직후인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이곳 출신 신기휴ㆍ이병태 등의 의병장이 크게 활약하고, 매국노 이근택 암살사건을 주도한 기신도가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교육활동에 종사하였고 3.1혁명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가 태어난 때는 국가운세가 위기로 치닫고 있던 시기였다. 1903년 5월 용암포사건으로 친러파가 세력을 잡은 뒤 러시아가 조선에 세력을 확대하고,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하여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같은 해 송병준ㆍ이용구 등이 매국집단 일진회를 조직하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 1906년 1월 조선통감부 설치, 1907년 1월 국채보상운동 시작, 3월 나철이 이끄는 오적 암살단 의거, 7월 고종퇴위ㆍ순종즉위, 한일신협약체결, 8월 정미의병, 1908년 12월 일제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1909년 일본군 남한지역 의병대학살작전, 10월 안중근의사 이토 히로부미 처단, 1910년 8월 경술국치, 10월 매천 황현 자결순국, 일제의 무단통치로 이어졌다. 

서민호는 비교적 풍족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어머니의 꿈에 지붕 위에 달이 떨어지는 것을 치마폭에 받았다는 태몽에 따라 호를 월파(月坡)라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1894년 호남에서 시작한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다가 구사일생의 전력이 있는 의기 있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고흥ㆍ벌교 등지에서 삼베장사를 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고 간척사업으로 고흥ㆍ보성ㆍ순천에 많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1930년 총독부가 조사한 대지주 명단에 282 정보의 땅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버님께서는 동학당에 가담하여 의병을 도왔으며 후일 이로 말미암아 진압군이 마을에 들어와서 마을을 대표하였던 아버님을 비롯한 다섯 사람을 처형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 진압군의 도포(참모)였던 유덕삼씨가 전날에 가세가 빈곤하여 그의 처가 해산을 했으나 조석을 끓이지 못했으므로 아버님께서 쌀 한 말과 돈 3냥을 내준 적이 있었다. 

그는 그 은혜를 못 잊어 하던 차 경각에 놓인 아버님만의 생명을 구하여 주었던 것이다. (주석 1)

유복한 가정이어서 서민호는 6세 때부터 각종 운동을 배웠다. 축구, 야구, 배구, 사격술, 승마까지, 당시 서민들의 자녀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스포츠였다. 어릴 때 배웠던 사격술이 뒷날 암살자들의 총격을 선제사격함으로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나의 유년시절 성격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신 분은 부친이었다. 6살 나던 해에 말타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강인하고 준엄하시면서도 온화한 애정으로 나를 키우려고 노력하셨던 것이다. 일찍 개화하셔서 자유로운 속에서 엄격하고 의협심이 강한 부친의 성격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와 같은 아버님의 성격에 영향을 받아 자유분방한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후련하리만큼 억세고 활달한 개구쟁이였다.

널푸른 바닷가 개펄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전쟁놀이로 해지는 줄 몰랐으며, 파도를 타고 물장구로 여름가는 줄을 모르는, 검붉은 피부의 건강하고 의협심이 강한 아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철부지의 맑고 탄력있는 동심의 세계에도 언제인지 모르게 어버이의 근심스러운 표정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곤 했었다. (주석 2)

서민호가 일곱 살 되던 해, 1910년 나라가 망한 것이다. 의협심이 강하여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아버지의 절망과 좌절을 아직 어린 아들은 지켜봐야만 했다.

우리 집안은 고흥군 동강면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농촌의 평민으로 아버지께서는 자수성가 하셔서 가세가 넉넉했던 때였다. 

그런데 갑자기 밀어닥친 일인(日人)들은 평지에 풍파를 몰고 왔던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헌병을 앞세우고 우리집엘 드나들며 갖은 협박으로 부친을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평화롭던 마을과 가정은 날로 어두운 그늘이 일기 시작했으며, 여기 저기 어른들의 한숨소리가 그칠 새 없었다. 나는 이때부터 일본놈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지 내 힘으로, 이 마을 일본 놈들을 모두 쫓아내야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품기 시작하였다. 밝고 곧게 살아야 할 동심의 세계에도 멍을 들게 했던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일본이 우리에게 얼마나 잔학했던가를 뼈저리게 느낀다. (주석 3)

주석
1> 서민호, <그때 그 이야기, 이 정권과의 투쟁>, <전남매일신문>, 1973년 8월 30일.(이후 <이 정권과의 투쟁>, 표기) 그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후 <전남매일신문>에 1973년 8월 30일부터 50회에 걸쳐 <이 정권과의 투쟁>이란 제목으로 연재하였다. 주요 내용은 이승만 정권과의 투쟁이지만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2> 앞과 같음.
3>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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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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