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구매 자주하는 이유는..." 그녀의 말에 울컥했다

배진경 2022. 12. 3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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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여성들... 정부의 노동 개편안, 여성 노동자에 큰 위협

[배진경]

연말을 맞아 여성노동연대회1) 주최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일터 내 젠더 폭력에 관한 토크쇼를 했다. '여성 노동자의 일자리 젠더 폭력 다시, 깊게 보기'라는 제목으로 열린 토크쇼에는 다섯 명의 여성 노동자가 패널로 등장하였다. 각각의 자리에서 각기 다른 노동을 하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외자기업의 위장청산에 맞서 투쟁 중인 사업장, 한국와이퍼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도 패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사업장의 자랑으로 '공동구매'를 꼽았다. "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공동구매로 해결한다"라며 "우리는 공동구매를 안 하는 게 없다"고 말했다. 사회자는 왜 그렇게 공동구매를 하느냐고 물었다. 여성 노동자는 답했다. "회사에 매여 있는 시간이 정말 많기 때문에 장을 보러 갈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 대목에서 울컥했다. 핸드폰 위에서 손가락 하나면 모든 것이 집 앞으로 배달되는 시대이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조차도 까딱할 시간이 없는 그야말로 시간 빈곤자였던 것이다. 소비를 위한 시간은 의외로 많이 필요하다. 마트를 들어서는 순간, 혹은 쇼핑 앱을 켜는 순간 머리와 손가락은 빠르게 돌아가며 최선의 합리와 효율을 위한 판단을 요구한다. 여기에 소요되는 많은 시간은 시간 빈곤자로서는 최악의 지출이다. 그 상황에서 공동구매는 최선의 선택이 된다. 서로 잘아는 동료들의 추천과 취향을 믿고 구매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구매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발생하는 최선의 연대가 된다.

역으로 너무 바쁘기 때문에 연대하지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날 패널로 참석했던 간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들이 연대하기 어려운 이유는 여성이더 바빠서예요. 오늘 저 말고 다른 분을 원래 추천했는데, 애기를 돌보아야 해서 못 나온 분이 계시거든요.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현재 여성들은 남성보다 육아 부담, 돌봄 부담이 훨씬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여성에게 부과된 돌봄 노동이 장시간 노동과 합해지면 여성은 시간 빈곤자가 되어 버린다. 노동시간은 삶의 질과 직결된다. 사람은 24시간 굴릴 수 있는 기계가 아니라 먹고, 쉬고, 자야 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삶의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돌봄노동
 
 카카오TV <며느라기2...ing>의 한 장면.
ⓒ 카카오TV
 
돌봄 노동시간은 노동시간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당신은 오늘 하루 몇 시간의 노동을 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부분은 임금 노동시간만을 답한다. 하지만 돌봄 노동은 삶의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 노동자의 기본값은 당장 노동에 투입될 수 있는 깨끗하고 단정한 외양에 휴식을 통해 충분한 기운을 충전하고 적당히 위가 차 있는 상태이다.

먹고, 씻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삶을 위해 쇼핑하는 이 모든 돌봄 노동은 누군가의 노동 기본값을 위해 필요하다. 그것은 곧 누군가의 시간으로 환원된다. 대부분 여성 노동자의 시간이다. 2018년 OECD 통계를 살펴보면 여성의 무급 노동시간은 하루 227.3분인 반면 남성은 45분에 불과하다. 유급 노동시간은 남성이 421.9분으로 여성의 273.3분보다 길다. 이를 합하면 여성은 500.6분, 남성은 466.9분으로 여성의 노동시간이 33.7분 더 길다. 여성들이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이유다.

12월, 고용노동부는 외부 연구기관에 의뢰하여 노동시장 개편안을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재 주 52시간으로 한정한 노동시간은 최대 69시간까지도 가능하게 된다. 하루 13.8시간. 마치 산업혁명 때로 회귀한 듯한 노동시간 계획표에 11시간 연속 휴게시간을 배치한다는 '배려'가 보인다. 하지만 노동 이후의 시간은 누군가에 의해 정의될 수 없는 오롯한 노동자만의 시간이다. 그 시간을 휴식으로만 정의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고 월권이다.

지금보다 더 긴 장시간 노동은 가뜩이나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에게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남성들의 장시간 노동은 여성의 돌봄 노동시간을 더 길게 만든다. 노동시장의 평균 노동시간이 길어질수록 여성 노동자들이 평균의 노동자가 될 가능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전체 노동시간이 길어지면 여성도 장시간 노동을 요구받지만 그 조건을 충족하기 어렵다. 돌봄 노동시간을 줄이기는커녕 더 늘어나는 상황에서 일과 생활의 병행은 가능하지 않게 된다. 결국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게 되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시간제 일자리뿐이다. 2021년 현재도 여성 노동자 중 시간제 노동자 비중은 26.4%에 육박한다. 네 명 중 한 명이 시간제로 일하고 있다. 성별 임금 격차는 현재보다 더욱 크게 벌어질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장시간 노동이 아니다

여기에 당연히 건강권 문제도 결부된다. 하루 대부분 시간을 노동에 바쳐야 하는 노동자의 건강상태가 좋으리라 기대할 수 없다. 만성피로 상태의 생활이 반복되면 건강에는 당연히 적신호가 켜진다. 더 많은 노동을 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더 큰 위협에 놓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안 그래도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더 긴 장시간 노동을 얹으려는 정부의 계획은 여성 노동자에게 더욱 매우 위험하고 심각한 위협이다. 장시간 노동은 그야말로 여성 노동자의 삶과 노동 전체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다.

산업혁명 시기 노동자들은 주당 80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평균 수명은 고작 17세였다. 21세기 한국의 노동 정책은 그때로의 회귀를 시도하고 있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산업혁명 시기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보다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것인가의 선택 앞에서 노동시간은 핵심을 쥔 열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시간 노동이 아니다. 여성 노동자의 시간을 돌려주기 위한 정책, 모든 노동자가 시간 주권을 갖기 위한 노동시간 단축이 절실하다. 

1) 한국여성노동자회, 전국여성노동조합,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6개 단위가 함께하는 연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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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가 쓴 글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2월호 '女性여성女聲' 꼭지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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