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에서 해방 되기가 이렇게나 어렵습니다
올해의 한 문장을 뽑자면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닐까요? "올해 당신의 '꺾이지 않는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시민기자들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편집자말>
[이현우 기자]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책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에서 연구를 한다는 것은 인류 지식의 경계를 아주 조금 확장시킨 것으로 비유한다. 본질적으로 겸손함을 요한다. 예를 들면 높고 커다란 돌탑에 작은 돌멩이 하나 얹어놓는 일과 같다. 어쩌면 모래 한 알 일지도 모르겠다.
패러다임 1은 패러다임 2에 비해 세상을 규칙적인 존재로 보고, 그 규칙을 발견하려 합니다. ... 이러한 연구의 결과는 어떤 보편적 혹은 통계적 '법칙'을 발견했다는 주장입니다. ... 반면 패러다임 2는 세상을 의미로 가득한 존재로 보고, 그 의미를 발견하려 합니다. 이런 접근은 구조보다는 인간의 동기와 의미에 초점을 두거나, 인간 내면에 있는 구조를 발견하려 합니다. - <모두를 위한 사회 연구>, 30p
도시는 자본주의 시장 질서가 가장 잘 작동하는 공간이다. 도시 공학에서는 자본이 모이고 이에 따라 사람이 모이는 현상에 주목한다. 따라서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나 법칙을 발견하는 패러다임 1에 해당하는 연구 결과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통계 프로그램 등을 활용한 양적 연구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를 통해 도시의 긍정적인 면이 부각된다.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명저 <도시의 승리>가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반동분자 성향 때문일까. '도시의 승리'가 가리는 빈곤과 불평등을 조명해보고 싶었다. 소수자가 사회에서 배제되는 것처럼 도시 빈곤 문제도 주목받지 못한다. 게다가 도시 빈곤 문제는 개인적 특성에 주목하여 빈곤의 몫을 당사자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인 관심과 개입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구에 필요한 자료도 충분치 않다. 가능하다면 빈곤의 책임을 빈자에게 돌리기보다는 빈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해석하는 새로운 관점의 연구를 수행하고 싶었다.
▲ 대학원 생활의 꽃은 논문 쓰기다(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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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로운 마음가짐으로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연구 주제를 정하는 단추부터 잘못 낀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평소 관심 있던 도시 빈곤과 관련된 단행본을 읽으면서 주제를 정하기도 전에 쪽방촌을 연구 대상지로 선정했다. 일반적으로 연구 주제를 먼저 정하고 연구 대상지나 대상을 정하기 마련인데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다.
이후 쪽방촌 연구계획서를 강의, 세미나, 학술대회 등에서 간간히 발표해 왔다. 간혹 신선한 소재라 흥미롭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번번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심사평이나 피어 리뷰(peer review)의 평은 '근거 부족'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위축되어만 갔다. 대다수의 평가는 특정 사례라 일반화하기 어렵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법칙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 쟁점이었다.
내 연구는 사례 연구 혹은 현장 연구로 불릴 만한 패러다임 2 관점의 질적 연구였다. 물론 나의 능력의 한계와 부족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는 경험상 단순히 논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다수의 도시공학 연구자들은 패러다임 1의 세계관 안에서 편중된 논의를 진행한다. 이러한 현실이 안타까웠다. 일반적인 이론이나 법칙을 발견하는 일이 당연히 세상에 필요한 일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 모래 한 알 얹어보고 싶은 열망은 커져갔다.
입학했던 2021년부터 쪽방촌에 들러 자료를 수집하면서 논문을 준비했다. 주민들과 쪽방촌 인근에서 거주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자료 수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초기에는 거리를 배회하기도 하고 처음 보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어느 날 운 좋게 쪽방촌 내 커뮤니티와 연결이 되었다. 그 이후로는 편하게 쪽방촌을 드나들 수 있었다.
하지만 강의와 세미나를 거치면서 자신감은 하락했다. 동시에 잘못된 방향으로 논문이 쓰이진 않을지 조마조마하며 두렵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다시 현장에 가서 주민을 만나면 이상하게 힘이 되었고, 연구실 동료들의 응원도 위로가 되었다.
네 번째 학기가 시작될 무렵, 다시 한번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나는 1년이 넘도록 에너지를 쏟아온 쪽방촌 질적 연구와 통계를 활용한 공모전에서 선정된 양적 연구를 병행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질적 연구로 학위논문을 쓰기로 했다. 석사학위 논문 심사는 중간 심사와 최종 심사를 거친다. 최종 심사 통과 후에도 약 한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수정을 거친다. 자료를 수집하고 논문 주제를 정하는 과정, 심사 과정 전부 순탄치 않았다.
중간심사 직전에 인대가 파열되는 바람에 목발을 짚고서 세 발로 심사장에 들어섰다. 심사위원들은 논문에 도움이 될 만한 건설적인 심사평을 많이 남겨주었다. 하지만 투혼에 비하면 심사평이 썩 긍정적이진 않았다. 논문의 뿌리를 뒤흔드는 심사평도 있었다. '멘탈'도 함께 휘청이는 시간이었다.
석사학위논문은 불성실하지 않다면, 박사학위논문에 비해 통과가 수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중간심사 결과를 듣고선 왠지 '내 논문만큼은' 통과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나를 칭찬해
어찌나 시간이 빨리 가던지, 어느덧 최종 발표가 다가왔다. 전날 새벽 늦은 시간까지 최종 검토를 거치고 심사장으로 갔다. 인대 상태가 나아진 것만큼 논문 발표도 나아졌으면 좋았으련만. 뭐라도 씌었는지 실수투성이의 하루였다.
발표 자료 마지막 세 페이지 정도가 댕강 잘린 것이다. 문제는 배부한 발표자료에도 마지막 부분이 누락되었다. 얼마나 준비가 안 된 사람으로 보였겠는가. 최종 발표 자료도 누락한 연구자가 관찰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믿어주겠는가. 절망감에 휩싸였다.
이미 혼은 떠나간 지 오래다. 발표를 마치고 짐을 주섬주섬 정신없이 가방에 담아 나오는 길이었다. 정신없는 차에 '학생들은 잠시 나가달라'는 말을 나가라는 말로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그 길로 심사장을 빠져나와 아내와 긴 통화를 나눴다.
사실 심사가 끝난 후에 심사 결과를 듣고 가야만 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결과를 듣지도 않고 퇴장하다니. 심사위원이나 학생들이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다. 그날의 일을 복기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다행히도 조건부 통과라는 소식을 받았다.
절묘하게도 굴곡지고 험난한 논문 여정과 한 해의 마지막이 맞닿았다. 이미 존재하는 자료를 토대로 연구하지 않고, 관찰하고 인터뷰한 결과를 논문에 담아낸다는 것은 설레면서도 두려운 일이었다. 논문을 쓰며 연구자로서 편향성과 해석 능력의 한계를 마주하기도 했다.
한 해를 돌아보니 논문을 쓰기 위해 현장에서 사람들과 보낸 시간들과 연구실과 강의실에서 논의하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여기저기서 의심의 눈초리와 질문을 받아왔던 순간들도 떠오른다. 무엇보다 내 안의 불신이 끝없이 스스로를 자기 검열의 장으로 데리고 가기도 했다. 고민하던 괴로움의 기억들이 지금도 가슴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따뜻한 위로와 칭찬의 한마디보다는 날 선 비판과 검열이 흔한 세상이다. 한 해를 돌아보며 지키지 못한 계획이나 달성하지 목표에 스스로를 탓하기보다는, 연초부터 연말까지 뚜벅뚜벅 걸어온 스스로에게 따뜻한 한 마디 건네어 얼어 있는 마음을 녹여보는 건 어떨까.
발표는 끝났지만 논문 마무리는 다 되지 않았다. 연말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마무리되진 않을 테다. 그래도 한숨 돌릴 여유 정도는 챙겨도 되지 않을까. 논문이 최종적으로 통과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논문 준비를 한 스스로를 토닥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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